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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요? 삶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복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겐 상상조차 하기 싫은 공포의 낭떠러지가 될 것이고, 반면 삶이라는 감옥에 갇혀 여러가지 이유로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겐 해방의 열쇠가 될지도 모릅니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이같은 '죽음의 양면성'을 '지구 종말'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소재를 활용하여 은유적이면서도 직설적으로, 추상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행성 충돌에 반응하는 저스틴과 클레어, 두 자매의 심리적 대비를 통해 죽음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데요. 그 과정에서 행성의 이름인 동시에 둘의 내면을 잠식하는 정신 질환인 'Melancholia(우울증)'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저스틴은 세계를 구축하고 확장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인물입니다. 겉으로 보면 명망 있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카피라이터에, 완벽한 남친에게 사랑받는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허나 그녀는 결코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그 세계의 구성원들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참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내면을 지배합니다. '가정'과 '사회'는 그녀를 구속하는 감옥에 불과하며 그 속에서 줄곧 분노와 무기력감을 느끼는데요. 이것이 바로 그녀가 앓고있는 우울증의 특질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 날마저 이러한 감정들이 마치 뒤엉킨 실타래처럼 그녀의 발목을 휘감아 버립니다. 게다가 그 날은 승진이 공표된 날이기도 한데요. 이제 남편이라는 존재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두려움까지 겹쳐 걷기조차 힘든 상황에, 사장의 지시로 광고 카피 아이디어를 요구하며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회사 신입 직원과 충동적인 성관계를 합니다. 이같은 돌발 행동을 통해 더 높은 직책을 빌미로 정신을 속박하려 드는 사장과, 부부라는 관계를 빌미로 육체를 속박하려 드는 신랑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립니다. 멀리서 볼 땐 영롱하게 빛나는 별이지만 인류를 몰살하기 위해 다가오는 행성처럼, 얼핏 그녀의 삶에 빛을 비춰주는 존재로 보이는 이들은 사실 숨통을 조이는 죽음의 올가미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여기서 잠시 저스틴의 가정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몸에 맞지 않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가정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두 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두 딸이 성장하여 각자의 가정을 이룰 때까지 꿋꿋이 견디며 그 세계를 유지해 온 인물입니다. 저스틴의 조카 레오가 그녀를 부르는 별명인 "강철"은 사실 어머니에게 더 잘 어울리는 별명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는 불안정한 내면을 가졌지만 스스로를 누르고 다스릴 만큼 그녀는 모질고 단단합니다. 나아가 주변인들 위에 군림하려 들며 자신과 같은 강인함을 요구합니다. 특히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둘째 딸에게 유독 가혹합니다. 불안에 떨며 대화를 요청하는 저스틴을 혐오 섞인 표정으로 냉랭하게 밀어내는 그녀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죠. 남편 및 두 딸과의 관계가 어떠했을지 말입니다. 오죽하면 큰 딸 클레어의 남편 존 마저도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언행으로 결혼식의 분위기를 깨는 그녀를 감당하기 버거워하죠. 아마 저스틴은 성장 과정 속에서 그런 어머니를 보며 결혼과 가정에 염증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처럼 불안정한 내면을 감추고 괜찮은 척 행동하는 나름의 방법을 습득했을 것입니다. 딸들은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닮아가니까요. 성인이 되어서는 나약해지지 않으려, 감정에 무너지지 않으려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미친듯이 일에 몰두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감정을 거부당하고 억제당한 채 그렇게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저스틴에게는 너무도 큰 스트레스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저스틴의 아버지 또한 그녀에게 안식처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하룻밤 묵고 가시라는 딸의 필사적인 부탁을 끝내 뿌리치고 달아나 버린 그의 모습을 보더라도, 독불장군 같은 아내의 등쌀에 평생 가정 밖으로 겉돌았을 과거가 그려집니다. 그런 아버지는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듬직한 대들보가 되어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언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직관적이고 충동적인 성향의 저스틴과 현실적이고 계획적인 성향의 클레어는 애초에 결이 맞지 않습니다. 저스틴의 우울증을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는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 클레어도 그녀가 자신의 세계에 위협이 된다고 느끼면 증오를 표출할 뿐입니다. 같은 핏줄로 연결된 자매일지라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드니까요.
그러므로 저스틴은 부모와 언니 누구에게도 친밀한 유대감과 한결같은 안정감을 얻지 못한 채 정서적인 고립 속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성장했을 거라 봅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상사, 혹은 남편과 같은 권위에 무의식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나아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환멸과 혐오를 품게 된 근본적 원인입니다. 그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공존해야만 하는 자기자신마저 혐오하면서 말입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여러모로 번아웃이 온 듯 한데요. 그토록 꼴보기 싫었던 부모의 불화한 모습이 트리거가 되어 위태로운 내면을 뒤집어 버립니다. 불안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녀에겐 잠깐의 진심어린 대화와 공감이 필요했을 뿐이며, 그저 자신의 감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단 한 사람이 필요했을 뿐인데요. 허나 결혼식장의 그 누구도 한낱 그녀의 감정 따위엔 관심 없습니다. 말로는 행복을 빈다면서 각자의 니즈를 채우기 위해 그곳에 있을 뿐입니다. 서로 비난하기에 급급하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들이 공들여 계획하고 준비한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게 우선인 언니와 형부,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주는 척하면서 업무적 능력을 착취하는 데만 혈안이 된 사장, 자기 욕정을 푸는 것이 더 급한 신랑까지, 역시나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그 날의 기행은, 인간에 대한 환멸을 표출하는 처절한 몸부림인 동시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외로운 절규였을지도 모릅니다. "지구는 사악해. 그러니 없어져도 아쉬울 게 없어."라고 냉담하게 말하며 눈 앞에 닥친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이 결과적으로 당연해보이는데요. 지구의 종말로 인해, 꽉 끼는 웨딩드레스처럼 자신을 옥죄었던 지긋지긋한 세계가 마침내 산산히 부서진다는 사실이 영혼에 평화를 안겨주는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이해받지 못한 채 삶의 무게를 버텨 왔던 극심한 우울증 환자 저스틴에게 있어, 죽음은 해방이자 안식이며 진정한 구원입니다.
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저스틴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직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칸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히틀러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돌출 발언으로 지탄받았던 그의 심리 역시 이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듯 한데요.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발언으로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개인적으로 히틀러의 파렴치한 행위들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인간을 향한 지독한 환멸과 혐오의 감정 자체가 자신의 그것과도 닮아있다는 의미의 발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극중 저스틴은 실제로 우울증에 시달려 온 감독 자신을 여실히 투영한 페르소나라 봐도 무방합니다.
한편 저스틴과 대척점에 놓여있는 인물이 바로 언니 클레어인데요.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애착을 갖고 그 구성원들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앞서 말한 어머니의 강철같은 면을 그녀 또한 일정 부분 물려받았습니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어떻게든 보전하려는 모습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처럼 주변인들 위에 군림하려 들기보다는 역할의 선을 넘지않으며 책임을 다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봤을 때 지극히 보편적인 사고를 가진 평범한 가정 주부지만 내면에는 저스틴과 또 다른 결의 불안이 늘 웅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말입니다. 이는 클레어가 그 세계의 일원인 동생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이유이자, 마음 한 켠으로 증오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극중에서 클레어는 '가끔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밉다'며 저스틴을 향한 증오의 감정을 격하게 두 번 표출하는데요. 그녀가 혼신을 다해 준비한 결혼식을 끝내 망쳐 버렸을 때, 그리고 행성의 충돌 직전 다같이 행복하게 끝맺음 하고 싶다는 그녀의 간청에 냉소적인 일갈을 날렸을 때입니다. 즉 자신의 세계를 위해 인내하고 헌신해 온 이면에는 그것을 위협하는 대상 앞에 분노와 두려움을 느끼는 그녀의 방어적인 심리 또한 존재합니다. 따라서 행성의 충돌이 임박할수록 우울증과 공황장애의 증상이 극심하게 발현됩니다. 마치 동생의 증상이 언니에게 옮겨간 듯 저스틴과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죠.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우울증이라는 질환을 행성으로 은유하여 두 자매의 심리적 변화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데요. 웅대한 크기의 행성이 우울증을, 그에 비해 너무나 자그마한 지구가 자매를 상징합니다. 멀어질 듯 가까워질 듯 지구를 위협하며 점차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멜랑콜리아 행성처럼, 우울증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삶을 집어삼킬수록 오히려 불안감을 초월해 버리는 저스틴과 그것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클레어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안주한 채 삶의 행복을 추구해 왔던 클레어에게 있어 죽음은 결코 해방이나 구원이 아닌, 외면하고픈 고통이자 부정하고픈 파멸인 것입니다. 자살을 택한 남편의 시체 앞에서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들을 지키고자 동분서주하는 처절한 모습에서, 피할 수 없는 최후의 순간을 남은 가족들과 함께 맞겠다는 절실한 바람에서, 그녀의 안식과 구원은 오로지 그동안 힘써 가꾼 그 세계 안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와 같이 저스틴과 클레어, 두 인물을 중심으로 플롯을 양분하되 둘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따라가며 지구의 종말, 즉 실존적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류의 두 가지 관점을 탐찰합니다. 과연 죽음은 파멸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고로 영화 속 멜랑콜리아 행성은 인간이라면 결국 누구나 직면하게 될 '죽음'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실제적으로 형상화한 장치로 확대됩니다.
아울러 이 영화는 존재론적 시각에서 만물을 창조한 절대자의 존재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아주 우아하게 들이미는 것 처럼 보입니다. 모든 인간, 심지어 개미 한 마리조차 스스로 원해서 이 세계에 태어난 생명체는 없죠. 자의와 상관없이 신이든 부모든 타의에 의해 모든 생명체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존재성을 부여받은 피조물들은 온갖 고통 속에서 탄식하며 살다가 죽어갑니다. 피조물인 인간 또한 이같이 부당한 생의 수레바퀴 아래서 그저 '악'에 길들여질 뿐입니다. 타인에게 해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전가합니다. 참혹한 악을 행하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나아가 후손에게 고통과 악을 대물림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사악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사악한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사악한 세계에 창조된 인간은 사악한 본성을 타고난 존재로 여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공산주의자인 부모로부터 출생한 아이에게 공산주의자란 꼬리표가 자연히 따라붙는 이치처럼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악한 세계에 태어난 악한 인간이 세계를 끊임없이 악하게 만든다는, 즉 이 세계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출구 없는 악순환에 영원히 갇혀있다는 논리가 이 영화의 기저에 깔린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라 생각합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말했죠.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빨리 죽는 것이 최선이다." 따라서 영화는 절대자가 자의적으로 창조한 '지구'라는 사악한 세계를 그보다 훨씬 큰 행성을 가지고 냉혹하게, 허나 우아하게 쓸어버림으로써 절대자의 체계를 전복하며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처럼 멜랑콜리아 행성은 평생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이 세계를 투시해 온 감독이 영화 창작을 통해 절대자에게 선사하는 "빅엿"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화'라는 또 다른 세계 안에서의 절대자는 감독 자신이니까요.
이 영화의 미학적 성취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웅장하면서도 차분한 클래식 선율과 서정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이미지들 속에 염세주의적 철학을 수려하게 펼쳐 냅니다. 스크린을 황홀하게 수놓는 종말의 이미지들이 마치 우주의 거룩한 창조처럼 느껴지는 착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정교하게 세공된 '슬로모션' 효과로 여러 장의 그림을 한 폭 한 폭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미적 만족감을 한껏 끌어올리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시종일관 시선을 어지럽게 뒤흔드는 '핸드헬드' 촬영, 그리고 영화관을 집어삼킬 듯한 압도적인 엔딩신이 차례로 어우러져 그 어떤 영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두 자매의 불안감 혹은 해방감을 낱낱이 공유하며 생생한 종말의 순간으로 관객을 초대하는데요. 단순히 철학적 사유에 골몰하는 작가주의 영화를 넘어 독특한 심리적 체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체험의 영화'로서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조금 희망적인 시선으로도 영화 <멜랑콜리아>를 음미해 보고 싶은데요. 결과적으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각성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세계에 만연한 악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다시 시작하고자 홍수로 인류를 멸망시켰던 성경 속 이야기를 모티브로, 어쩌면 인류 스스로 이전까지의 악의 역사를 깨끗이 종결하고 새로운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일말의 여지 또한 희미하게나마 남기는 것 같습니다. 흡사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마법의 동굴'에 저스틴과 클레어, 그리고 레오가 마침내 모여 앉습니다. 나뭇가지들을 엮어 만든 최후의 보금자리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행성을 맞이하는데요. 그들의 모습이, 혹시 사람과 사람의 굳건한 연대를 통해 종말의 뒤편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새로운 시작, 즉 구원의 마법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요? 개인의 세계도 인류의 세계도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언제나 그렇듯 정답은, 영화에 삶과 내면을 투영해 보는 각자의 몫입니다.
<멜랑콜리아> 별점 / 한줄평
☆4.5
파멸과 구원이 공존하는 찬란한 마법의 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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