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에에올이 개봉한 후 한참 뒤에서야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난해할 것 같다는 오해때문이었죠.
하지만 그러한 오해와 달리
이 영화가 보여준 놀라운 상상력과 연출은 신선함과 즐거움으로 다가왔고,
곧바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은걸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재개봉을 더욱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담아, 처음 봤을 때 적었던 리뷰를 수정해서 다시 올려봅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온갖 잡동사니에 짓눌려 있는 듯한 에블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일상에서는
영수증, 남편, 딸, 딸의 친구, 아버지, 잔치, 손님, 기계, 분실물, 국세청 등
모든 장소(everywhere)에 한꺼번에(at once)에 존재해도 그 모든 것(everything)들을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일들이 쉴틈없이 쏟아집니다.
그러는 와중에 멀티버스가 등장하며 영화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뀌어 나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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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에올에서는 무수한 멀티버스 만큼이나 수많은 오마주와 패러디가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매트릭스>는 에에올의 주요 레퍼런스가 된 영화입니다.
기계를 통해 다른 세계로 접속하는 과정이나 전투 기술을 다운로드 받는 모티브는 매트릭스의 그것을 따릅니다.
파티션을 배경으로 위기가 시작되며
알파 웨이먼드가 지시를 하고 에블린이 '선택'을 해야하는 국세청 시퀀스는,
파티션을 배경으로 위기가 시작되며
모피어스가 지시를 하고 네오가 '선택'을 해야하는 사무실 시퀀스와 일치합니다.
그 외에도 킬 빌, 화양연화, 스페이스 오디세이, 라따뚜이, 패왕별희, 와호장룡, 성룡의 코믹 액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엘비스 프레슬리 등 수많은 패러디와 이스터 에그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감독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 중 <킬 빌>과 <화양연화>의 사이에 등장하는 극장 장면은 영화 속 스크린을 넘나들고
심지어는 양자경 배우의 현실까지도 넘나들며 멀티버스의 경계를 관객의 스크린으로까지 확장합니다.
(해당 장면에서는 양자경 배우가 실제로 활동했던 아카이브 영상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무술을 배워 액션 스타로 성공하게 되는 과정마저도 극 중 캐릭터와 비슷합니다.)
이 영화가 상영 시간 내내 멀티버스의 동시성과 가능성을 영화적 체험으로 재현하는 과정은 경이롭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만의 멀티버스(=또 다른 선택과 가능성)를 떠올려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죠.
분명 수많은 멀티버스 속에서 길을 잃을만도 한데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구심점을 잃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놀라운 점입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지 몰랐다는 감독 다니엘스의 발언과
나비효과와 같은 예측의 어려움을 겪었다는 경험담에 비해서
그들이 완성한 영화적 작품성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만큼 많은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스의 극단적이고 과장된 연출은 오히려 이 영화에 독특한 매력을 부여했죠.
다른 한편으로 과거에 있었던 감독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간략한 배경 설명 - 처음에 다니엘스는 숏폼 형태의 영상을 업로드하며 활동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자신들이 만든 산만하고 자극적인 컨텐츠들이 밈으로만 소모될지도 모른다는 성찰을 하게 된 이후 본격적으로 감독의 길을 걷게 됩니다.)
멀티버스는 마치 어지러울 정도로 모든 것이 만연한 인터넷을,
버스점프는 마치 B급 코미디같은 기행을 일삼는 온라인 플랫폼의 인물들을,
다른 멀티버스의 경험을 다운로드 받는 과정은 인터넷 검색으로 타인의 지식과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는 모습을,
조부투파키는 마치 SNS와 커뮤니티에서 볼 수 있는 염세주의적 태도를 형상화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멀티버스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연출은 화려하지만 산만하고,
반복되는 B급 코미디 또한 호불호가 갈릴만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코미디나 패러디로 끝내지 않고
무한한 멀티버스와 끝없는 상상력으로 연결시키며 개연성과 완성도를 채워주니
정신없이 쏟아지는 독창적인 연출이 나중에는 전율이 되어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혐오와 코믹을 넘나드는 B급 연출들은
실존적 위기로 이어지는 극단적 허무주의(조부투파키와 베이글 = 아무도 없는 O형 거울 = 중앙이 비어있는 0의 이미지),
공 사상(돌), 물아일체,
색즉시공 공즉시색(에블린과 인형 눈알 = 가족들로 채워진 O형 거울 = 중앙이 채워진 0의 이미지)과 같은 철학적 주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위에 적힌 간략한 설명대로 베이글과 눈알은 형태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안티테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베이글을 만든 이유가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서"라는 조부투파키의 대사는 허무주의에 빠져 실존적 위기를 겪는 사람의 말로를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부질없다 여기는 순간 삶의 의미 또한 사라지는건 당연한 수순일 것입니다.
인형 눈알은 웨이먼드가 여러 사물에 부착함으로써 귀엽고 장난스런 분위기를 설정하는 장치이지만
영화 내적으로는 더욱 중요한 상징과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멀티버스 이론에서 사소한 선택의 차이가 다른 세계를 창조하듯, 눈알을 부착하는 '사소하면서도 다정한 행동'은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한 시각은 돌같은 무생물조차 표정을 갖춘 존재로 재탄생시킵니다. "빨랫감이 좋아할 것 같아서 옮겼어"라는 웨이먼드의 대사 또한 그러한 시각을 반영합니다.
그렇게 눈알의 부착은 사물의 고정된 정체성을 해체함으로써 존재론적 유연성을 상징하는 행위가 됩니다.
조부투파키가 "돌은 움직이면 안 돼"라고 하자 에블린이 "규칙은 없어"라며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죠.
조부투파키에게 있어 모든 존재는 부질 없는 것으로 정해져 있지만, 에블린에게 있어 모든 존재는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그러했듯이.
영화에서 그러한 시각은 웨이먼드의 인생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화양연화의 오마주 장면에서, 웨이먼드는 자신이 좋은 면을 선택해서 보는 것은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다정함'이 자신의 생존 전략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에블린이 조부투파키와 함께 존재론적 허무주의에 빠져들 때, 웨이먼드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면 다정함을 선택해야 해"라며 그러한 태도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영화 후반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인형 눈알을 자신의 이마에 부착하며 그의 세계관을 수용합니다.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서로에게 다정해지는 것뿐'이라는 주제를 극대화하는 제스처이자, 불교 속 제 3의 눈을 시각화한 깨달음입니다.
이 상징 체계는 불교의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형상이 곧 공허이고 공허가 곧 형상임)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후 에블린은 베이글의 '공허' 앞에서 얻은 깨달음인 '다정함과 친절함'을 무기로 적들을 변화=화해시킵니다.
모든 가능성의 존재로 채워진 조부투파키는 공허로 향하고(색즉시공)
모든 실패로 원치 않는 공허한 삶을 살던 에블린은 모든 가능성의 존재로 향합니다.(공즉시색)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교는 인연의 역할을 강조하고, 에에올에서는 다정함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것의 유무는 모든 가능성의 존재에게 있어 조부투바키기와 에블린만큼이나 다른 길을 걷게 만듭니다.
(철학과 사상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하게 되면 딴길로 새게 되니, 혹시라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허무주의, 공 사상,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검색해보시는걸 추천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철학적 지식이나 해석과는 상관없이
에블린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러한 주제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들어 줍니다.
위와 같은 배경지식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부질 없음, 선택과 후회, 또 다른 가능성, 성공과 실패, 다정함과 친절함, 변화, 이해와 사랑 등
보편적인 단어들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죠.
모든 거절과 실패로 더 이상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로 가득찬 삶일지라도,
그렇게 나의 존재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세상과 타인을 향한 다정함과 친절함을 담은 메시지는
'지금 너와 함께 하는 이 한줌의 시간을 소중히 하겠다'는 에블린의 대사를 통해 가족애 이상의 따스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전 우주의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한없이 작고 찰나와 같은 순간에만 존재하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겠죠.
그렇게 '다정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온몸으로 전하는 '사랑'은
작게는 사과에서부터
크게는 행성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돌과 나, 세계와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비록 과감하고 개성적인 연출로 인해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놀라울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함께
모든 것 모든 장소에서 수많은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었던 최고의 멀티버스 영화 :
이미지 출처
https://www.youtube.com/@ashe71259
https://youtu.be/T51QSG9VN8w?si=i94OXETA_IWQP7nA
https://www.youtube.com/@MovieTimeCli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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