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병을 소재로 부부간에 일어나는 의문의 사건을 다룬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 <잠>. 신인감독 답지않게 영화의 짜임새가 탄탄하다. 게다가 영화의 흐름이나 빌드업 해가는 과정이 굉장히 현실적이다. 특히 공포영화의 클리셰인 '쟤 저러다 죽는데 왜 저래' 라던가, 쓸데없이 주인공을 방해하는 인물들이 여기서는 없다. 어떤 이들에겐 이 흐름이 좋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심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별로 무섭지 않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들이 아니다. 영화 사나리오 밖에 있는 것들이 더욱 현실적인 공포를 가져다준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가해자의 시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오현수(이선균)와 정수진(정유미) 부부는, 부부사이에 일어난 일은 같이 극복해 나가자는 모토로 서로를 배려하고 잘해나가려고 노력하는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랫집에 새로 이사 온 여자가 층간소음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자, 이전에 살던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그 대화를 잘 들어보면 소름이 돋는 부분이 있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항의하고 비꼬는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수진이 그 할아버지의 행방을 알기 위해 아랫집으로 갔을 때 천장을 보니, 천장에다 대고 계속 막대기 같은 것으로 두드린 흔적이 있었다. 얼마나 세게 두드렸는지, 천장에 흠집이 꽤나 많이 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층간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윗집에 표출한 흔적이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수진은 그저 할아버지의 죽음과 몽유병과의 관계에만 집착한다. 귀신이 씌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만약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층간소음에 괴로워했고 천장을 그렇게 만들 정도로 죽기 직전까지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수진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가졌어야 했다. 그러나 수진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귀신이 되어서도 자기들에게 해코지하러 왔다고만 생각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가해자의 시선인가?
또 수진은 정작 키우던 개가 죽고 아랫집에 꼭 닮은 개가 입양되자, 그제야 개 짖는 소리가 이렇게 컸구나 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알게 되고 나서도, 자신들이 주변에 얼마나 피해를 줬는지에 대한 자각은 조금도 없다. 그저 자신이 키우던 개와 같은 종의 개가 짖는 소리에 점점 예민해지기만 할 뿐이다. 결국 할아버지에게 복수한다는 명목으로 죄 없는 개부터 죽이지 않는가? 정말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 물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변했겠지만, 수진의 정신은 '내가 사람들에게 그런 피해를 주었구나'가 아니라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로 흘러간다. 전형적인 가해자들의 마음가짐이다.
이 영화는 수진과 현수 부부의 변화를 현실적으로 차근차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 섬뜩한데, 내 행동이 정당하고 남들은 나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지 보여준다.
신념과 맹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적으로 쓰일 때는 보통 '증거가 없어도 무조건 믿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람 사이에도 믿음과 사랑이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믿음이 가고 어쩐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 또한 이념이나 사상에 대한 믿음도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이념과 사상에 빠지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성은 본능과 감정적인 선택 이후 합리화하는 도구일 때가 더 많다. 생김새, 체취, 말투, 과거의 사건들, 모든 것들은 경험의 축적으로 인한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그저 그럴 것'이라는 이유 없는 맹신이 기저에 깔려있다. 그러니 인간은 끊임없이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잘못된 선택을 한다. 그 신념과 맹신의 끝에는 정치와 종교가 자리 잡고 있다. 정치와 종교는 끊임없이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호도하고 믿게 만들려고 한다.
수진과 현수는 굉장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처럼 나온다. 그러나 그것이 점점 자신이 기울고 싶어지는 쪽으로 믿음이 자리 잡는다. 사람이 무언가를 믿는 것에는 대단한 증거나 인과관계가 필요하지 않다. 단순하게 몇 가지 퍼즐조각만 맞추면, 뇌는 그 사이를 메꾼다. 뇌는 정보의 비워진 틈을 메꾸는 데에 특화된 기관이다. 특정한 감정조건에서 특정한 몇 개의 퍼즐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남들이 보기에 굉장한 논리적 비약이 있더라도, 스스로는 그것이 논리적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것이 맹신이다. 원래 인간의 뇌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논리적인 인간이라도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특히 다른 분야보다도 정치와 종교에서는 그 차이가 심한데, 그것이 틀렸다고 해서 아무리 합리적인 증거를 가져와봐야 이미 맹신을 가져버린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지지 않는 이상,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신념을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맹신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한심하게, 혹은 위험하게 바라볼 뿐이다. 수진과 현수처럼. <잠>에서의 마지막은 현수가 바라본 수진의 섬뜩한 모습이 그려지지만, 수진의 내면에서는 현수가 얼마나 섬뜩하게 보였을까?
결혼이라는 굴레
결혼은 법적 계약관계다. 많이들 착각하지만, 결혼이 신성하다는 믿음은 특정 종교와 정치적 이유로 나온 것이지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재산을 안전하게 배분하기 위한 법적 장치였을 뿐이다. 사랑해서 연인이 되고 같이 아이를 키우는 것과,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있는 것은 분리시킬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요새처럼 다양한 관계를 맺는 사회에선 더욱. 영화에서 수진과 현수는 사이좋은 신혼부부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같이 극복하자는 현판까지 걸어두고, 힘들어도 싸우기보단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 모습은 아주 보기 좋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은 좋을 땐 누구나 좋은 법이다. 동거하며 오래 사귄 연인들, 혹은 결혼해서 시간이 지나 서로 다사다난한 날들을 보내고 나면 그게 쉽지만은 않다. 좋을 때 '여보, 자기'하며 안고 어화둥둥 하는 것은 누군들 못할까. 정말 어려운 일은, 파트너의 밑바닥을 알고 보고 나에게 화살이 돌아와도 그것을 감당하는 일이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산다는 것, 내 가족들을 공유한다는 것, 서로가 경제적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무서운 일이다. 단순한 성적 끌림의 연장선으로 감당하기에는. 그러기에 만화 <타짜>에서는 고니가 청혼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는 게 아니라, 의리를 약속하며 청혼한다.
수진과 현수는 결혼이 그 지경이 될 지 몰랐다. 어려운 일을 헤쳐나가자는 게 그런 광기와 평생 싸워야 하는 것인줄은 더욱. 사건이 클라이막스에 오르고 더이상 감당하기 힘들다는 걸 알고 그냥 떠나려 하는 현수에게, 수진은 함께 극복하자는 그 현판을 집어던진다. 영화적으로 생각하면 그 뒤에 이어지는 드릴씬이 가장 섬뜩하겠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여기가 가장 섬뜩한 부분이다. 둘은 말로, 사랑으로, 법적으로 약속했다. 같이 극복하고 평생 함께하자고. 그것은 그저 좋을 때 하는 입발림이 아니었다는 것을 둘은 잘 안다. 현수가 죽을 뻔한 것을 구해준 것도 수진이다. 그렇다면 그 광기도, 같이 감당해야 한다. 현수는 다시 결혼, 아니 지옥으로 스스로 돌아온다. 데이빗 핀처의 영화 <나를 찾아줘>는 그런 결혼 자체의 섬뜩함을 끝까지 몰고 간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잠> 역시 잠과 광기와 오컬트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이면에는 결혼생활 자체에 대한 섬뜩함이 서려있다. 지금 당장은 해결한 듯 보이나, 살 날은 많이 남았다. 그 둘은 언제고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서로의 밑바닥을 두려워 할 것이다.
칼이나 드릴로 협박하는 것이, 귀신이나 몽유병이 무서운가? 아니.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층간소음, 맹신, 결혼이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내가 피해를 주는지도 모른 채 피해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감정적인 판단을 이성적이라 착각하는 것, 섣부르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도와준다 약속하는 것.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잠을 푹 자고 싶다.
출처: 본인 브런치
https://brunch.co.kr/@casimov/205
거기에 이선균 배우의 카멜레온 같은 연기 변신도 너무 좋았습니다. 킬로의 죠나단은 어디에...?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