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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 초반부 괴팅겐 시절 젊은 오펜하이머가 몰입하는 파블로 피카소의 추상화는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1937)'입니다. 이 장면 자체는 실제로는 영화적 허구이며, 오펜하이머가 독일 괴팅겐에 있었던 1927년으로부터 10년 후에 미 버클리 대학의 정식 교수가 될 무렵에서야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극 중에서 피카소의 그림은 주인공 오펜하이머에 관한 여러가지 정보를 제공하고 스토리를 미리 암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1. 오펜하이머가 어린 시절 성장했던 뉴욕의 저택에는 오펜하이머의 부모가 소유한 피카소의 초기작(이른바 청색시대 작품)을 비롯한 상당한 미술 작품 컬렉션이 있었고, 나중에는 오펜하이머도 역시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피카소 그림을 자신의 집 벽에 걸어두었다. 

 

 

2. 미술사적으로 20세기 초 피카소가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본격적으로 소개한 입체파(큐비즘) 스타일은 관습적인 원근법을 타파하고 하나의 대상을 다각도에서 중첩적으로 묘사한 혁신적인 예술 사조였는데, 오펜하이머 역시 뉴턴역학으로부터 막 벗어난 당대 물리학계에서 새로운 미지의 영역이었던 양자역학의 주도자 중 하나가 되었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가 미시 세계의 초월적 모습을 눈으로 생생히 보는 것처럼, 2002년에 예술가 피카소와 과학자 아인슈타인을 서로 비교하는 책을 냈던 학자 아서 밀러는 "피카소가 볼 수 있었던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그들만의 독립된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세계였다"라고 평한 바 있다.

 

 

3. 정치적으로도 오펜하이머는 피카소처럼 스페인 내전 이후 비슷한 시기에 공산당 관련 활동을 했고, 다만 죽을 때까지 공산당원직을 유지했던 피카소와 달리 오펜하이머는 지식인으로서 잠시 동조하는 선에 그치다가 맨해튼 계획을 전후하여 공산당에서 멀어지게 된다. 본인은 나름 진지하게 활동했으나 그로 인해 다른 공산당원들에게 적대와 홀대를 받게 된 것도 피카소와 오펜하이머의 공통점.

 

 

4. 그림의 주제는 오펜하이머의 연애사를 암시한다. 그림의 여인은 피카소의 4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 발터로, 피카소의 뮤즈로서 그의 화풍의 정점을 찍게 한 가장 대표적인 모델이자 연인이었다. 그러나 1935년 이후 피카소가 여성 사진 작가 도라 마르를 만나게 되면서 테레즈와는 점차 사이가 멀어진 뒤 다시 재결합하지 않았고, 그 상황에서 1937년에 그린 위 그림에는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젊은 연인 마리 테레즈의 모습이 우울한 푸른색 분위기 속에 담겨 있다. 오펜하이머 역시 진 태틀록을 만나면서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했고, 피카소가 테레즈와 불륜 관계였던 것처럼 오펜하이머도 결혼 이후에 진 태틀록과 사적인 만남을 이어갔으나 점차 사이가 멀어지던 와중 진이 사망하게 된다.

 

 

5. 그림 속 여성의 왜곡된 모습은 위대한 면과 결함을 둘 다 지녔던 오펜하이머 자신의 심리적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는 차가운 파란색의 인물과 주황색 배경의 색상 대조 역시 오펜하이머의 모호한 이중성을 강조한다.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가 자신이 다뤄본 캐릭터 중 가장 모호하고 역설적인 캐릭터라고 단언했고,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저자들은 오펜하이머가 '야심과 불안감을, 의지와 두려움을, 금욕주의와 혼란을' 동시에 지닌 모호하고 불가사의하며 논쟁적인 인물이자 신화라고 요약했다.

 

 

6. 영화에 한해서, 그림 속 여인의 뒤틀린 얼굴은 나중에 원자폭탄의 성공적인 일본 투하 소식을 로스 앨러모스의 과학자들에게 알리던 오펜하이머가 강당에 모여있던 참석자들 중 맨 앞에 서 있던 젊은 여성의 얼굴이 핵폭발에 얼굴 피부가 벗겨지는 환상을 보는 장면을 예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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