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는 복잡하다. 오사카로 이사 가기 전에 모인 자리에 바쿠가 등장하자, 아사코는 료헤이를 버리고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난다. 그런데 아사코는 바쿠와 떠나다가 바쿠를 버리고 료헤이를 찾으러 되돌아간다. 정반대의 선택을 연거푸 한 아사코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에서 힌트들을 찾다보면 이 영화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아사코는 언제부터 료헤이를 사랑했을까? 아사코가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를 알게 된 이후, 아사코는 료헤이와 더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판단해서 료헤이와 연락을 끊고 공연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토호쿠 대지진이 일어나자 료헤이를 찾으러 공연장 쪽으로 무작정 걸어왔다. 이때 이후로 둘은 5년 넘게 관계를 유지한다. 재앙이 벌어지자 의지할 사람으로 료헤이를 찾은 것이다. 이는 이후 대사에서도 나오듯 ‘고마움’이지 ‘사랑’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델이 된 바쿠를 다시 처음 만났을 땐 떠나가는 차를 배웅했었다. 아사코가 여기서 바쿠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쿠가 아사코의 집으로 찾아왔을 땐 문을 닫고 회피해버렸다. 그런데 오사카로 이사하기 전 다섯 명이 모였을 때, 바쿠가 다시 찾아오자 바로 손을 잡고 떠났다. 바로 전 대화에서 ‘토호쿠까지 차를 끌고 간 료헤이가 대단한 것이다. (…) 잘못되지 않은 것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료헤이가 고마운 것이지 사랑은 아닌 것 같다. 여기까지만 보면 더더욱 아사코는 료헤이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 당연하고, 방조제에서 료헤이에게 다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아사코는 료헤이와의 시간을 ‘긴 꿈’ 취급하면서 드디어 꿈에서 깨어났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꿈을 ‘행복했던 꿈’이라고 묘사한다. 그러고서 아사코는 잠들었다가 깨어나는데, 바쿠는 바다를 보려고 센다이에서 멈춘다. 바쿠는 토호쿠 대지진을 겪지 않아서 센다이에 방조제가 세워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센다이에 세워진 방조제를 보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며 아쉬워한다. 하지만 아사코는 료헤이와 함께 동일본 대지진을 겪었다.
아사코가 토호쿠 대지진부터 료헤이와 함께한 시간들이 단순히 료헤이에게 고마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재앙을 복구해나간 긴 시간이었음을 이 시점에서 방조제에서 깨달았던 것 같다. 재앙에 관심이 없는 바쿠를 보면서 말이다. 첫눈에 반해 온 세상이 바쿠였던 시기, 갑자기 바쿠가 사라졌을 때 아사코는 료헤이를 통해서 상실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방조제에서 다시 료헤이에게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방조제를 보고 나서 료헤이에게 돌아온 두 번째 아사코는 더 이상 료헤이에 기대지 않겠다고 말하고, 불어난 강물을 보며 더럽다고 말하는 료헤이에게 ‘그래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센다이에는 방조제가 세워져 있다. 아사코가 다시 바쿠를 사랑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토호쿠 대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방조제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대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의 세계로 갈 수는 없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 바쿠가 사라져서 괴로웠지만 그 이후 료헤이와 함께 마음속에 방조제를 세울 수 있었고, 그래서 아사코는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바쿠와 함께 대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던 세계로 향하는 것은 그래서 불가능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이미 발생한 대지진 이후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대지진 이후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영화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사코와 료헤이는 더러운 강물을 바라본다. 동시에 관객들을 똑바로 쳐다본다. 료헤이가 다시 찾아온 아사코를 용서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사코는 ‘대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의 세계가 아닌 ‘대지진 이후 함께한’ 료헤이에게 왔다. 아사코는 대지진이후 더욱 성장했고 방조제가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더러운 강물을, 동시에 관객들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