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코 나눔으로 감사히 '서울의 봄'을 봤습니다. 이렇게 재미 있다니! 놀랄 정도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더 빨리 후기를 썼어야 하는데 이것저것 조사해보다가 조금 늦어졌습니다. 영화 리뷰라기보단 그냥 보고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봤습니다.

 

-

우선 영화는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이미 전두광 일당의 쿠데타가 성공한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뭔가 남은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허구와 사실을 잘 섞어서 긴장감을 유지했습니다. 영화에선 시작부터 모 아니면 도이고 계속 엎치락뒤치락했던 것처럼 묘사됐지만, 실질적으로 신군부의 계획은 시작 전부터 성공할 확률이 굉장히 높았고, 유일한 위기라 하면 신사협정 기만으로 돌아간 9공수여단의 서울 진입 시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황정민과 정우성 두 주연뿐 아니라 조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제목이 서울의봄입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영화가 다루는 12.12 군사반란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서울의 봄은 10.26 박정희 사망 이후 5.18 민주화 운동 직전까지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국면을 가리킵니다. 뒤돌아 보면 12.12가 결정적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이후에도 민주화가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정치인, 학생, 지식인들의 민주화 요구가 이어졌습니다. 결국 감독은 12.12가 서울의 봄을 짓밟고 다시금 군사 독재의 겨울을 가져온 결정적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의 봄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하면서 끝납니다.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학생들의 저항을 이끌어내고, 이 저항이 용공분자들의 불순한 준동이므로 군부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집권 계획을 만들어 소외된 지역인 전라도 광주를 목표로 잡아 특전사 부대를 투입해 학살을 벌입니다. 이걸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꺾였습니다. 그 후 공산주의자 김대중이 국가 전복을 꾀했다며 사형을 선고한 뒤 전두환이 마침내 대통령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이 점차 밝혀지면서 분노한 학생들의 운동이 6월 항쟁(6.10)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서울의 봄'은 서울의 봄의 종식을 가져온 신군부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과 연결해서 봐야 합니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악'은 물러갔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합니다. 전두환은 학살의 책임자로서 끝까지 사과 한 마디 안 하고, 29만원밖에 없어서 벌금도 낼 수 없다고 한 뻔뻔한 악마였지만 결국 내란죄 유죄 판결을 받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아 사회적으로 죽었고, 생물학적으로도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박정희-전두환의 27년간의 군사 독재는 한국 사회에 많은 그림자를 남겼고, 그 그림자는 지금도 한국 사회를 알게 모르게 규정짓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돈이면 다 된다는 과도한 물질주의입니다. 세계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1인당 소득 3만 달러를 넘은 나라 중에서는 매우 드물게 자기 표현보다는 생존을 중시하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지닌 나라입니다. 먹고 살게해 줄 테니 다른 문제에는 일절 신경을 끄라고 군사 독재 시절 내내 주입받았고, 이는 한국적 사고방식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참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511516#home)

 

두 번째로 다른 것에 도전해보는 걸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독재정부에서 장려하지 않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연대 책임을 질까 두려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빠르게 남들이 한 걸 따라잡는 건 잘하지만 독창적으로 무언가 만들어내는 건 대체로 잘하지 못합니다. 

 

세 번째 총체적 부패구조입니다. 독재 정부에서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은 요직에 있는 거물과 누가 연줄이 있는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인맥에 집착하여 세계적으로 가장 학연에 집착하는 나라가 됐죠. 오늘날에도 자원의 중앙 쏠림은 심각해 누가 정권을 잡냐에 따라 수 많은 유관기관의 장이 바뀌고, 수많은 프로젝트의 향방이 바뀝니다.  

 

네 번째 언론이 무너졌습니다. 정당성이 없었던 신군부는 특히 언론 길들이기에 공을 기울였습니다. 말 잘 듣는 언론은 키워주고, 상대적으로 말 안 듣는 언론은 재산을 몰수하고 통폐합시켜버렸습니다.  대신 언론이 군부를 제외한 사회 다른 영역에서 군림하는 건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언론이 정부와 결탁하고, 사회에는 갑질하는 전통이 이어졌고 오늘날 '기레기'라 불리며 대중 신뢰를 잃은 언론 문화가 형성됩니다.

 

다섯 번째, 전라도 차별입니다. 군대에 갔을 때 "전라도는 역시 뒤통수 친다", "느낌이 쌔해서 보면 역시 전라도다"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실 유전적으로 똑같고, 한국처럼 작고, 문화적으로 동질성이 높은 나라에서 지역에 따라 인간성이 달라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전라도 사람들은 인터넷과 현실에서 조롱당합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만든 건 집권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전라도와 김대중을 악마화한 신군부의 영향이 큽니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은 내부 응집성을 강화하기 위해 손쉽게 적을 만들어냅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파시즘의 인종 청소겠지요. 오늘날에도 어떤 집단을 악마화함으로써 지지를 얻으려 하는 위험한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제목으로 살짝 어그로를 끌었습니다만... 당연히 전두환에 분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전두환에'만' 분노하지 말고,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전두환스러운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게 영화 제목이 '12.12'가 아니라 '서울의 봄'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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