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BFI 아이맥스관에서 개봉 당일 1회차 오펜하이머 70mm 필름 상영을 보았습니다. 자정에 시작해서 끝나고 집에 오니까 새벽 5시네요.
이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 자체는 이리저리 꼬지 않고 단순했지만 인물과 시간 사이를 오가는 편집이 꽤 복잡하고 현란한 부분들이 있었고,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읽은 분들은 몽타주처럼 지나가는 장면들도 친숙하게 빠르게 캐치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동진 평론가의 1시간 원작 가이드 영상은 책의 디테일에 비하면 수박 겉핣기 수준이지만, 이 영화의 주요 지점들을 미리 잘 짚어줍니다.)
이 책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트리니티 실험 전과 후를 마치 반을 접듯이 동시에 전개시키는 것이 역시 가장 효율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평전의 영화화의 모범 사례 중 하나가 될 것 같아요.컬러와 흑백 대비는 메멘토의 그것을 활용한 것이지만 이번 영화는 디테일이 많을 뿐 전체적으로는 전기적이라 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다만 영화의 구조나 스타일상 러닝타임이 길다는 것이 조금 체감이 되네요. 아바타 2보다는 길고 바빌론보다는 짧게 느껴졌습니다.
아이맥스에서 봤을 때 이 영화의 최강점은 사운드인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여러 실제 폭발 장면에서 생생히 느껴지는 진동이나 오펜하이머가 경험하는 환상 장면들의 음악과 소리의 강도 - 이런 것을 감안할 때 사운드가 좋은 것에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혹시나 아이맥스를 절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돌비도 괜찮은 차선이 될 듯 합니다.
이번 영화의 킬리언 머피는 극의 탄탄한 중심이지만 혼자서만 막 빛나기보다는 여러 조연들의 도움을 조금씩 받는 편인데, 제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루드비히 괴란손이 OST 테마곡의 멜로디를 감동적으로 잘 잡아서 킬리언 머피의 연기를 더 돋보이게 했고, 일부 아름다운 장면들에 사운드디자인이 기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다만 외국에서 본 기준으로는 큰 스코어나 효과음이 약간 불필요하게 씨끄럽거나 과해서 일부 대사를 잡아먹었는데 이거는 놀란 영화의 고질적인 면 같습니다.
뻥뚫린 아이맥스 화면비로 여러 장면들을 보니까 확실히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하는 느낌이 들었고, 또 흑백 화면들은 마치 역사의 순간이 담긴 흑백 테이프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영화의 톤 역시 그 시대를 직접 본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고, 특히 70mm 버전은 필름 특유의 텍스처와 일부 미세한 필름 손상들이 더 그런 역사적 효과를 실감나게 해주었어요.
때문에 이 시대 역사에 관심있는 분 뿐만 아니라 과학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도 한 번은 이 영화를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특히 아인슈타인이 생각보다 자주 얼굴을 비치네요. 트리니티 실험 장면의 소리적 연출과, 그 뿐만 아니라 아날로그적으로 밤하늘 별빛같이 묘사된 원자 세계의 비주얼도, 뭔가 개인적으로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후반부(스타게이트 장면과 늙은 주인공이 모노리스를 만나는 장면의 숨소리)가 살짝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인터스텔라의 이스터에그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네요.
조연 배우들 중에서는 데인 드한이 은근히 제일 씬스틸러처럼 느껴진 한편, 플로렌스 퓨는 커리어에서 가장 팜므파탈스런 모습을 보여주네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흑백에서 카리스마가 빛나는 악역이긴 하지만 그가 나올 때마다 주인공 오펜하이머의 테마와 비슷한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흥미로운 결정 때문인지 입체적 또는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네요.
그리고 이 영화가 한국에서는 광복절에 개봉할텐데, 예를 들어 마치 명랑같은 영화를 보러간다는 생각으로 이 무거운 영화를 보시면 실망하십니다. 게다가 아바타같은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영화가 아니고 절반 정도가 청문회를 무대로 하는 등 역사물로서 매우 진지하기 때문에, 비록 놀란 감독이 플롯의 구심점을 잘 잡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 관객들 입장에서는 다소 지루하거나 답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원작을 읽어본 기준으로는 이번 영화의 대본은 거의 마스터클래스이지만, 오락을 기대하거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분들에게는 어려울 영화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인물의 심리를 비주얼로 묘사하려 하는 부분은 놀란 감독의 작품에서는 처음 보는 신선한 연출들이 일부 있어서 상당히 흥미롭고 인상적이었고, 또 우리의 광복과 해방 뒤에 그림자처럼 놓여진 핵으로 바뀐 이 세상의 변화가 지닌 의미와 함의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보고나니 일본에서 개봉할지는 여전히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이긴 하네요.
질문 있으시면 모두 답변드릴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