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있음. 하지만 스포가 중요한 영화가 아님.
한 여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알리테아. 일상에 부족함이 없는, 자신의 현실을 즐기는 서사학자입니다. 그런 알리테아가 어느날 영국의 집을 떠나 이스탄불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죠. 알리테아는 비행기 안에서 공부를 하면서 내내 다리를 달달 떱니다. 마치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것을 완벽하게 습득하기 위해 조급증이 인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알리테아가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묘한 존재들이 자꾸만 그녀에게 말을 걸고 겁을 줍니다. 알리테아는 애써 이런 존재들을 무시하며 학회에 이어 관광을 하다가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파란 회오리 모양의 유리병, 마치 바닷속 소용돌이로 빠져드는 듯한 그 유리병을 그녀는 뭔가에 홀린 듯 고릅니다. 동료 학자가 그런 거 말고 내가 다른 걸 사주겠다고 하는데도 "아니, 난 이걸로 됐어요."라고 자신의 선택을 단호하게 강조합니다. 그 병을 갖고 숙소로 돌아온 알리테아는 열심히 병을 닦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뚜껑이 열리면서 병에서 거대한 인간이 나왔습니다. 아니, 이건 알리딘의 지니... ... 아니 진, 정령입니다? 정령은 알리테아에게 자신이 "어쩌다가 알라딘의 램프 신세가 되었는가"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 가지 소원을 빌어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고 말하는데... ...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알라딘"의 또다른 버전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건, 조지 밀러 감독의 신작 "3000년의 기다림"의 줄거리입니다. 알리테아와 지니는 영화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정확히는 삶 속에서 만난, 혹은 스쳐지나간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들이 이야기한 사랑의 에피소드는 닮았습니다. 또, 이야깃속에 등장하는 여성과 남성의 모델들 역시 둘과 닮은 꼴입니다. 첨에는 이게 무슨 환생 스토리인가 싶었는데, 보다 보니 생각이 달라집니다. 아, 이건 사랑학 강의구나.
영화 속 집착, 망상, 짝사랑, 섹스중독 등으로 표현되는 에피소드들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기술" "올 어바웃 러브" 등에서 말하는 여러 잘못된 사랑의 유형과 닮았습니다. 사랑의 심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의 오류' 중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지 마라, 그건 당신이 익숙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뿐이다. 엄마처럼 안 살겠다면서 엄마처럼 사는 건, 아빠처럼 안 살겠다면서 아빠처럼 사는 것도, 그런 익숙함 탓에 오는 잘못이다. 또 잘못된 사랑을 반복하는 사람은, 자신이 예전에 좋아했던 타입이 익숙하니까 또다시 그런 사람을 만나려 들기 때문에 잘못을 반복한다. 이 영화 속에서는 그런 에피소드를 몇 개고 소개합니다. 집착, 쩔쩔매는 애원하는 사랑, 떠나야 할 때를 놓쳐버리는 사랑, 그런 수없이 많은 사랑을 옛날이야기라며 들려줍니다.
특히 지니는 잘못된 사랑의 화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지니는 잘못을 되풀이하려 듭니다. 대놓고 애원부터 하는 거죠. 알리테아는 그런 지니에게 "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알리테아를 설득하기 위해 지니는 자신이 어쩌다 이런 꼴이 됐나 그간 만난 "여성편력"을 담담하게 털어놓습니다. 알리테아는 그런 지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더니 소원이 생겼다고 합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을 하고는 "나랑 사귀자! 그게 내 첫 번째 소원이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순간 저는 에엥? 하는 소리를 낼 정도로 놀랐는데요, 그건 알리테아가 아무리 봐도 지니에게 사랑을 느낀 것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너 이름이 뭐니?" 같은 수준의 흥미가 생겨 "사랑? 까짓것 해보지 뭐!" 하는 느낌인데요, 이걸 보고 어이 없음을 느낀 건 지니도 마찬가지인 듯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알리테아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사귀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사실 "사랑의 기술" 등에서 말한 완벽한 사랑의 첫 단계입니다.
책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감정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첫 눈에 반해서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 곁에 있을 사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즉 "사랑에 빠지지 말고 사랑을 능동적으로 골라 하라"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알리테아가 선택한 사랑, 첫 번째 소원을 이루기 위한 대상 "지니", 그리고 그를 받아들이는 알리테아의 마음은 딱 저런 꼴입니다.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룬, 자존감이 높은 알리테아. 그런 알리테아였기에 그는 지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기로, 말 그대로 순수하게 "그 자체"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처음 지니는 단순히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런 알리테아를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만, 알리테아와 함께 지내면서 그 역시 달라집니다. 예전같으면 늘 상대에게 집착하고, 어떻게든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변화시키려고 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자기계발에 힘씁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탐구하고, 노력하고, 지식을 습득하며 순간순간을 즐깁니다. 그것은 지니를 '인간에 가까운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지니는 인간처럼 행동하고, 인간처럼 말하며, 인간처럼 되어갑니다. 이제 지니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에 가까워지다보니 필멸 역시 닮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지니, 그런 지니가 하나의 서사로 살아있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늘 무언가를 갈망하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알리테아는 다릅니다.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그저 지니가 자기 자신으로 있기만을 바라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지니를 죽음에 이르게 만듭니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자, 위시마스터가 그의 존재의의인데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하며 곁에 있기만 하라니, 이것만큼 무리한 요구도 없거든요.
알리테아는 끝의 끝에 가서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알리테아는 완벽한 사랑을 무너뜨리기로 작정합니다. 차라리 완벽하지 않은 사랑을 하겠어,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그래서 알리테아는 그가 존재하기 위한 마지막 소원을 빕니다. 그 결과, 자신의 사랑이 떠난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나는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으니까 우린 떨어져서라도 그저 살아있기만 한다면 그걸로 좋다, 라고 생각하면서요.
지니가 떠난 후 알리테아는 혼자 남았습니다. 이제 알리테아는 끊임없이 지식을 탐구하는 대신 책을 씁니다. 지니의 얼굴을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적습니다. 이 이야깃속 지니의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건 마치 지니가 이야기한 정령의 나라와 같습니다. 정령의 나랏속 정령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고 합니다. 이야기라는 대화, 그건 그들의 존재를 계속해서 있도록, 그리고 믿도록 만든다고 합니다. 그건 오래 전 알리테아가 스스로 만들어냈던 첫사랑과 같습니다. 알리테아가 만드는 이 책 "3000년의 기다림"에는 오래 전 망상이었던 첫사랑을 떠올리며 적는 지니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때의 알리테아와 지금의 알리테아는 다릅니다. 알리테아는 믿고 있거든요. 지니는 존재하였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였고, 그 사랑은 이 책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영화의 끝에 알리테아는... ...
"3000년의 그리움(무심코 이렇게 적었는데 다시 보니 그럴 듯하네? 그래서 그냥 냅둠)"은 호텔 안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속 아라비안 나이트를 영상케 하는 옛날 이야기의 연출이 상당히 좋습니다. 저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는데요, 특히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멋진 ost입니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오페라풍의 음악은 압도적이더라고요. 원래는 대충 일어나려고 했다가 음악이 좋아서 다들 나가고 저 혼자 남은 영화관에서 끝까지 듣고 나왔더랬습니다. 이상, "아바타" "슬램덩크" "장화신은 고양이" 모두 안 땡기시는 분들을 위해 추천하는 영화, "3000년의 그리움"의 대충 손가는대로 적은 간단한 후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