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스타탄생'의 신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배우는 박성웅씨라고 혼자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신세계]에 출연 전까지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계속 곱씹으면서 이중구라는 캐릭터도 덩달아 떴죠. "살려는 드릴게", "죽기에 딱 좋은 날씨다" 같은 대사도 계속 회자되면서 사람들이 박성웅이라는 배우를 잊을 수 없게 되었는데 무려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 사이에서 이렇게나 배우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건 대단한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성웅씨 본인이 밝힌 후일담에 따르면 연기가 영 미덥지 않아서 최민식 배우에게 불신을 산 뒤 하차할 뻔도 했다고 했는데, 이 정도면 정말 인생역전의 사례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배우의 상황은 극 중 캐릭터와 매칭되어 명연기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탑건 2]에서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매버릭은 아이스맨과 재회해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합니다. "It's not what I am, It's who I am..." 이 장면에서는 매버릭의 고뇌에, 톰 크루즈가 흔들리는 영화 업계에서 배우라는 일에 얼마나 큰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는지가 보이죠. 마찬가지로 [신세계]에서 이중구가 처한 상황은 배우로서 박성웅씨가 긴장했던 느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롭기도 합니다. 이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자칫하면 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이대로 지지않겠다는 허세를 피우는 모습이 썩 그럴싸합니다.
더불어 박성웅씨의 외모도 이중구의 캐릭터에 완전히 싱크되었다는 게 있겠죠. 그다지 다정해보이지 않는 첫인상에, 얼핏 보면 야비해보이는 얼굴, 큰 키와 덩치는 외모만으로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위압적입니다. 정말 만만치 않은 적이라는 인상을 단번에 남기죠. (저는 배우를 평가할 때 이미지를 빠트리고 연기로만 평가하는 게 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실제로 깡패이신 분들이 [신세계]에서 제일 좋아할 캐릭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외모나 행동거지로만 본다면 정청은 좀 품위가 떨어지지 않나요? ㅎㅎ
한번 잘 쌓은 캐릭터는 평생의 자산이 되기도 한다는 걸 박성웅씨가 몸소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이 후에 투톱 주연으로 조폭 보스 역할을 바로 꿰차는가 하면, 최근까지도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조직폭력배 역할을 또 하기도 하셨죠. 이에 질리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또 익숙한 이미지로 안전하게 가면서 조금씩 노선 변경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예전에 박중훈씨가 gv에서 말했는데 '천의 얼굴'이란 수식어는 사실 거짓말이라고요. 달리기를 잘해도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이렇게 주종목이 나눠지듯이 배우는 결국 그 사람의 이미지와 경험에서 표현의 베리에이션이 정해져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 부분에 동의했습니다. 명배우라고 일컬어지는 로버트 드니로나 알 파치노 역시도 엇비슷한 역들을 하고 그게 또 먹힙니다. 이런 부분에서 박성웅씨는 정청이라는 캐릭터를 기반으로 쌓은 이미지에서 조금 다르고 신선하게 변주된 또 다른 캐릭터와 만날 수 있다면 좋겠죠.
저는 [무뢰한]에서 박성웅씨의 연기가 꽤 괜찮다고 느꼈습니다. 이른바 '연기 변신'을 안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타고난 피지컬이나 각인된 이미지 때문에 그게 쉬운 것도 아니죠. 원래 한 이미지를 세게 박은 배우들이 그걸 뒤집는 건 더 힘든 법이니 말이죠. 박성웅씨가 괜찮은 시나리오를 만나서 또 다른 캐릭터로 관객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데렐라 임팩트가 한번으로 끝나면 그것도 아쉬울테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