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너무 재미없었습니다. 속된말로 10노잼.
근데 제가 재미없게 본 거랑 별개로 수작이에요.
건강식 같달까. 사람이 어떻게 단짠단짠만 먹어요... 살다 보면 싫어도 가끔 이렇게 슴슴한 걸 먹을 일이 생기죠.
실제로 몸에 좋은지 어떤진 모르겠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쨌든.
누가 그러던데요. '제목을 조커가 아니라 시민 아서로 지었으면 욕 안 먹는다'고.
뭐 일리는 있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DC세계관을 차용한 이상 관련 팬덤의 질타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사람들이 원한 건 아마도 할리 퀸과 손잡고 세상을 때려부수는 미치광이 쇼였을 겁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이 아주 없진 않았어요. 기대치의 한 20% 쯤?
다 보고 나와서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허한 속을 달래며 곱씹다 보니 조금 감이 잡히더라고요.
이게 전편과 유기적으로 잘 맞물린, '고담이란 가상지역'에 대한 감독의 비전이구나...
토드 필립스는 고담이 왜 우범도시가 됐는지 아서 플렉을 통해 작가로서의 자기식 해석을 내놨습니다.
돈 내고 보러 간 보편적 관객들이 화가 나거나 실망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무시한 게 문제지만요.
특히 뮤지컬 분량조절은 좀 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여기서 또..? 이런 느낌.
물론, 물 들어올 때 노젓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니 인간적으론 창작자 입장도 공감 못할 바는 아닙니다.
전편이 청불(R등급)로 10억 달러를 넘겨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덕에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자 한 명의 예술가로서 이런 꿀 같은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 겁니다.
제작 지원도 빵빵하겠다ㅎ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본인이 하고 싶은 폴리 아 되를 구현하겠어요.
못하죠 보통은. 그런 식으로 날아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프로젝트도 여럿 있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비록 재미는 덜했으나 조커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된 DC 기록물,
기존 선배 세계관들의 프리퀄로써도 일정 수준 이상의 제법 괜찮은 족적을 남겼다고 봅니다.
우리가 아는 건 그저 혼탁한 무법의 고담사회뿐이고, 그래서 고담은 왜 그런가? 란 질문에는 답하지 못해왔어요.
기껏해야 범죄자가 많아서..? 정도에 그쳤고, 이 질문에 제대로 접근한 사람조차 없었는데 토드 필립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체화된 겁니다.
앞서 언급했듯 분명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MSG를 쳤으면 더 좋았겠지만;
길거리에 쓰레기가 쌓여가는 붕괴 직전의 사회상과 서로 이해가 다른 계급 단위의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정신병자로 상징되는 복지체계의 몰락, 그로 인한 과격한 팬데믹, 현실과 동떨어진 미디어의 괴리,
그리고 그런 모든 현상을 하나의 캐릭터로 압축시킨 '뒷골목에서 태어나는 배트맨'으로 마무리한 것이 전편이고,
나올 때마다 얼굴이 반갈죽 되어 영원히 고통 받는 하비 덴트...뒤틀린 정의를 실현하게 될 투페이스와
입이 찢어지고 맥락이 없는 진정한 사이코패스 농담꾼 조커의 탄생, 질서를 수호하는 법원에 폭탄테러를 하는
이미 빌런화된 시위대를 보여주며 고담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본작입니다.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그 고담, 말하자면 토드 필립스표 '고담 비긴즈'에요.
하고 싶은 이야기에 충실하면서 톤앤매너도 유지하고 DC의 미덕도 지켰으니 사실상 할 건 다 한 셈입니다.
여기에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 대신할 것]이라던 조커(로서)의 마지막 대사가 화룡점정.
참고로 조커는 이름이 아니라 칭호에 더 가까운 굳이 예를 들면 트랜스포머의 '프라임' 같은 거라서
부제 폴리 아 되는 이렇듯 막바지에 가서야 설명됩니다. 할리 퀸은 의도된 눈속임이고 거의 맥거핀이라 봐도 무방해요.
무너진 긴 터널을 뚫고 빛이 새어나오는 구멍까지 간신히 기어가서,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굴다가 [뭐야 너? 조커 아니네]라며 매몰차게 돌아서는 할리 퀸을 겨우 마주하면.
관객을 작품에 투영하던 전편과 마찬가지로 본작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점이 낮아야만 완성되는 폴리 아 되의 아이러니. 할리 퀸은 관객의 페르소나.
짜증은 나지만 그렇다고 인정을 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으니까요ㅋ
여담이지만, 메가박스의 오리지널 티켓 앞면에 거울로 스스로 조커가 되어보는 기믹이 있는데...
이래서 오티가 좋습니다. 이만큼 작중 내용을 잘 함축하는 굿즈 시리즈를 못봤거든요. 가히 독보적.
폴리 아 되란 추상적 개념을, 디자인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종이 한 장에 심플하게 담아내는 게 쉽지 않음.
이게 약간 콜럼버스의 달걀 비슷해서 결과물만 보면 이딴 건 아무나 다 만들지 싶어도, 발상 자체가 대단한 겁니다.
아무튼 노잼이라 흥행은 어려워 보이고.. 평론가들 반응도 차가워서 아쉽지만 토드 필립스는 개인적 성과 차원으로 만족해야 할 겁니다.
워너의 그릇이 크다면 앞으로의 제작환경에 차등을 두거나 특정인에 불이익을 주진 않겠죠.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불과합니다만.
저도 이런 말 한 사람들인 중 한 명 인데 이게 단순히 제목만 조커를 쓰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dc 세계관이랑 별개로 토드 필립스 감독이 창작한 본인만의 광대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
냈다면 욕을 이 정도로 먹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당연히 dc 세계관 갖다 쓰면서 제목만 조커가 아닌걸로 해봣자 의미는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