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속 열람 하시겠습니까?
아노라 첫 관람했습니다. 회사일 때문에 5분 지각해버려서 앞부분을 놓친 것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러 갈 때 예고편도 보지 않고, 감독명을 제외하곤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가는 편이라
스크린에서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이 보여서 계속 긴가민가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영화 초중반부쯤 되서야 알겠더군요. 아! 원어할의 그 친구구나 라면서.
마이키 매드슨의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스크린에서 그 정도로 적나라하게 성노동자의 워크타임을 본 건 처음이었기에, 아주 수위가 높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역할에 혼신을 바치는 모습이 뇌리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을 빗나갔던 건 영화가 생각보다 가벼우면서 재밌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 신계급사회의 일면을 다루는 방식이 <기생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번개같이 흘러간 결혼소동 못지 않게 정신 없이 재미있게 흘러간 이혼소동을 보고 있자니,
이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세지에 대해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요.
저는 이 영화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뿌리에서 떨어져버린 이민자 2세들을 조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세속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과정에서 돈은 벌었지만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개인을 그린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사이에 서 있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깊은 애증을 길러버리고 만 주인공의 모습이 흥미로웠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애니가 이고르와 관계를 맺다 말고 갑자기 그를 공격하게 된 건,
진정한 온기는 자신의 뿌리만이 줄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사실로부터 비롯된 수치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빈곤에 대한 증오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를 공격한 후에 다시 이고르의 품에 안겨서 울게 되는데, 이는 이고르가 영화 후반부에서 주장한 "나는 너를 서포트하려는 것일 뿐이다" 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주인공이 아무리 자신의 본래 정체성이 싫다 한들, 그녀를 위로해줄 수 있는 대상 역시 그것 뿐이라는 역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역설이 주인공을 하염없이 울게 만든 것 같습니다.
이반과 이고르의 관계를 대비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통찰도 좋았습니다.
이것은 특히 '체위' 를 통해서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애니는 이반과 관계를 나눌 때 눈을 맞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결혼 생활 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후에도 이반은 애니와 대화를 나눌 때 술이나 약에 취해 반쯤 눈이 풀려 있거나, 선글라스를 쓰고 있거나 하여 애니와 눈을 제대로 맞춘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의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고르와 관계를 나눌 때에는 처음으로 서로 눈을 맞추게 됩니다. 하지만 그 시선에 애니의 수치심은 더더욱 깊어질 뿐이었습니다. 인생 역전을 위해 자신이 부끄러워하던 러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이용하려 했지만, 그에서마저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버림을 받아버렸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애니가 이혼 직후 이고르와 이반의 집에서 잠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될 때.
애니가 "왜 날 강간하지 않았을 건데?" 라고 묻자, 이고르가 "난 강간범이 아니니까." 라고 대답하는 대사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동문서답이면서 우문현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니는 이고르에게 왜 당신은 나를 다른 남자들처럼 성적 만족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 것인지 물은 것이고, 이고르는 자신이 빈곤한 노동층일지는 몰라도 영혼을 팔지는 않았다는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이 대답을 듣자 애니는 이고르가 쫄보라서 강간을 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욕을 하곤, 곧바로 이고르에게 담요를 던져 줍니다. 이고르가 애니에게 두르라고 건네줬던 스카프와 같은 색깔이었습니다. 이고르의 친절에 애니가 처음으로 보답을 한 순간이었고, 그 다음 날 창밖에는 새하얀 눈이 내립니다.
그 눈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보고 어느 정도 그를 인정하게 된 것이 애니의 머릿속에 조금이나마 순수성을 되찾아 주었다는 의미였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두서 없이 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류 | 제목 | 글쓴이 | 날짜 | 👀 | 👍 |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