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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 수연, 미주
영화가 끝나고 좀 불쾌하면서도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지현씨와 조여정씨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이야기나 함의를 좋아하긴 힘들더군요.
- 얼핏 보면 에로티시즘으로 긴장시키는 작품같지만 이 영화의 핵심긴장은 계급에서 나옵니다.
이 영화는 두가지 계급이 나오는데, 하나는 상류층과 그 이하 중하류층으로 구분되는 사회적 계급입니다.
또 하나는 토마스 만이 말한 문장,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다'가 가리키는 애정관계에서의 계급입니다.
성진과 수연 사이에서는 사회적 계급의 충돌이 자꾸 생기고, 수연과 미주 사이에서는 애정관계에서의 계급적 충돌이 생깁니다.
- 사회적 계급에서의 충돌은 딱 두가지 결론만을 전제합니다.
그 정해진 계급대로 갈 것인지, 아니면 계급적 전복을 꾀할 것인지. (종종 계급 자체를 해체해버리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그것도 일종의 전복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그런데 애정관계의 충돌은 그런 식으로 해결이 안됩니다.
자기가 상대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고통이라면 덜 사랑하면서 자신의 집착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이 주는 애정만큼 상대도 자신에게 애정을 주게 만들거나 하는 결론만이 있습니다.
애정관계에서의 투쟁은 계급의 전복이나 순종으로 귀결되진 않습니다.
둘 다 서로 사랑하거나, 둘 다 서로 사랑하지 않거나 거의 둘 중 하나로 끝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상대가 "더" 나를 좋아하게 하는, 상대적 우위의 개념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여전히 더 사랑해도 내가 만족할 만큼만 사랑받으면 그걸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두가지를 섞어놓습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좀 이상해집니다.
- 영화의 결말부터 보겠습니다.
수연은 그 지옥같은 감금생활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고, 미주가 도리어 감금되어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수연이 미주를 감금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떠오르는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따르는 형평의 복수겠죠.
내가 받은만큼 상대에게 고통을 되돌려주려고?
그런데 이것만 따르려면요. 중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냥 감금하는 게 아니라, 자기 집안에 상대를 감금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감금된 공간에서는 상대가 자신을 계속 볼 수 있고, 그 감금 자체는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여러가지로 불편과 위험이 따르는 행동입니다.
이걸 영화에서는 햄스터 키우는 행위로 은유하지만, 사람은 햄스터가 아니죠.
제가 말하는 건 사람을 그렇게 감금하고 키우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요.
사람을 그렇게 감금하고 키우는 게 별로 실익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 집에 폭탄을 하나 들여다놓고 사는 셈입니다. 아주 어리석어서 절대적 통제를 자신한다면 모르겠지만요.
- 그래서 영화는 '수연에게 미주가 갖는 쓸모'의 장치를 마련해놓았죠.
수연이 필요할 때마다 미주를 성욕을 처리해주는 대상으로 키운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수연이 그 비밀방 안에 들어가서 미주가 자신의 성기를 핥게 하는 장면이죠.
이 장면을 도덕적으로 따지기 전에, 이 욕망이 현실적인지를 봐야됩니다.
세상에는 그런 변태같은 여자도 있긴 하겠죠. 그런데 영화에서, 수연의 그 비정상적인 성욕을 묘사를 해둔 적이 있나요?
이 영화는 그 어떤 인물의 성욕도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 이 영화는 성에 관한, 성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진이 미주랑 섹스하는 이유? 계급적으로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편안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계급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수연과의 결혼생활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그 비오는 날 밤 성욕이 발생하는 게 이 영화에 따르면, 성진이 미주에게 자기가 어떤 계급의 출신인지 고백하고, 자신처럼 와인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앞에서 편한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진은 지금 자신이 원래 누렸어야 하는 계급적 일치감을 섹스를 통해 누리는 것입니다.
영화가 그것만을 두 사람의 섹스의 동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주가 성진이랑 섹스하는 이유? 이 사람은 심지어 레즈비언입니다.
성진한테 성욕을 느낀 게 더더욱 아닙니다. 이 사람이 성진이랑 섹스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수연의 소유물을 뺏을려고요. 그리고 뺏었다는 걸 과시하려고요.
(이 부분에서 영화는 레즈비언이라는 캐릭터의 성정체성 관련된 묘사를 전혀 안합니다. 바이섹슈얼이라면 그것이라도 표현을 했어야하는데 말입니다)
- 그러니까 이 영화의 결말이 황당합니다.
왜 수연은 미주에게 자기 성기를 핥게 하나요?
지배행위에 대한 은유라면, 그 은유의 방식이 너무 찝찝하고 더럽습니다.
이미 영화는 미주가 그 비밀의 방에 들어가서 세간살이를 갖추고 살고 있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연이 미주를 지배하는 것은 완전히 굳어졌습니다. 더 이상 뭘 보여줄 게 없습니다.
미주가 야시시한 옷을 입고 족쇄를 찬 채로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순종적 태도가 가리키는 상황 전체를 삼척동자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과한 연출이고 불필요한 연출입니다.
성적인 장면을 보여줘야겠다, 성적인 장면으로 계급간의 권력 차를 보여줘야겠다는 쓸데없는 야심입니다.
영화가 무슨 지휘자, 첼리스트 이런 것들을 설정으로 깔아놓지만 끝이 추접스러워집니다.
"미주는 수연의 아랫쪽을 소리를 내며 핥아댔다."
영화가 미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그냥 전락해버립니다.
- 왜 이런 일이 생기냐면 포르노적 시선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적인 장면을 연출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성적인 장면을 불필요하게 끼워넣거나 정도가 과하면 세계와 스토리 전체가 다 무너집니다.
그 어떤 이야기라도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계급적 속성과 그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하면서 그 끝을 '성기를 소리내며 핥았다'로 끝내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계급도, 성도 다 천박해져버립니다.
포르노적 시선이 대단한 파격인 것처럼 착각하는 창작자들이 있는데 (예전에 SF 소설 응모전을 했을 때 여성형 로봇을 남성인간이 착취하는 소재가 반복되었던 것처럼) 그건 나쁘기 이전에 진부합니다.
포르노는 이미 현실에서 숱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걸 보든 안보든 사람들이 이미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일상에 녹아든 포르노를, 영화 속 캐릭터들이 자행한다고 뭔가 충격적이고 기이한 사건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김대우 감독은 성에 대한 시선이 엄청 옛스럽습니다.
포르노적인 것을 보여주면 그게 대단히 신선하거나 충격적 은유가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는 점에서요.
포르노적인 연출은 너무 진부해서 문제이고 그만큼 이야기를 시시하게 만들 위험이 커서 문제입니다.
- 이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계급은 폭력적 수단을 써서도 전복할 수 없고, 결국 스스로 굴종하게끔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계급에 대한 자발적 굴종,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진 진짜 공포입니다.
왜냐하면 계급은 소유에서 나오거든요.
나보다 더 갖고 있는, 나보다 상위의 계급에 있는 사람을 죽여도 내 계급이 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위협해도 내가 계급적으로 뭔가를 쟁취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까.
성진의 갈등이 비롯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불륜을 수연이 목격한 건 둘째 문제입니다.
수연을 죽여서 입막음을 해도, 수연의 집과 지휘자의 자리를 자신이 지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갈등은 수연을 살릴까 죽일까가 아닙니다.
수연을 죽이든 살리든 자신의 집과 사회적 위치가 다 날아갈 것 같다는 계급적 추락의 불안입니다.
수연이 죽으면, 수연이 신랑이 아니게 되니까 성진은 '분식집 아들'로 돌아갑니다.
수연을 살리면, 수연이 성진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성진은 '분식집 아들'로 돌아갑니다.
계급은 전복이 불가능합니다. 스스로 계급을 끌어올릴 수도 없습니다.
계급을 상승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나보다 상위계급의 사람에게 얹혀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제시하는 계급투쟁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엇...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라구요? 네. 이미 봉준호가 [기생충]에서 계속 떠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영화의 주제를, 조금 더 성적인 은유로 이 영화는 동어반복을 하고 있는거죠.
- 이 지점에서 영화가 더 흥미로워 질 수 있었다면 그것은 미주의 존재일 것입니다.
이 캐릭터가 왜 흥미롭냐면, 계급전복이 불가능하다는 영화 속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기생충]의 기우네 식구처럼, 뭔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하면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합니다.
아니오. 그의 계획은 아무리 진전시켜도 얻는 게 없습니다.
그 집은 수연의 집이고, 성진은 수연의 남편입니다. 첼리스트 자리도 간당간당합니다.
남의 남편을 꼬셔서 무슨 '진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차라리 영화가 수연의 분량을 줄이고 이 허무맹랑한 몽상을 믿고 있는 미주를 관객의 시선으로 더 관찰하게 했다면 흥미로웠을지도 모릅니다.
이 캐릭터는 단순히 멍청한 게 아니라, 뭔가 좀 몽상가적인 면이 있거든요.
야심과 실행력은 있는데 세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달까요.
그런데 영화는 미주를 사도마조틱한 캐릭터로 그리는데 그칩니다.
- 평이한 영화를 잘 만든 영화와 비교하는 건 좀 잔인한 짓이지만 그래도 이 경우에는 해야겠네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엑스 마키나]를 떠올렸습니다.
이것도 사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단지 그 계급투쟁의 존재가 인공지능일 뿐이죠.
감금한 대상이 인공지능인데, 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려고 하는 게 성공하면 어떡할 것인가.
이것은 현대의 인간이 인공지능의 통제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지구상 제일 뛰어난 종이라는 자아도취가 마침내 다른 존재에 의해 부숴질지도 모른다는 현대의 공포를 의인화해서 그려놓은 훌륭한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남성이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보호한다는 게 얼마나 남성중심적이며 괘씸한 이야기인지도 보여주고 있죠.
[엑스 마키나]가 좋은 이야기인 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계급적 우위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기계를, 도구를, 인공지능을 인간보다 아래의 존재로 여깁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대등하지 않습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거죠.
그런데 이 영화는 인간이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세워놓은 전제를 깨트려버립니다.
근데 기계가, 인공지능이 인간을 따돌리는데 성공하면 어떡할건데....??
여기에 버튼 안눌리는 인간은 없습니다.
- 이 지점에서 [히든 페이스]는 완전히 반대로 갑니다.
우리가 당연히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사고, 인간사회는 계급으로 나눠져있고 그걸 뒤집는 건 아주 힘들다는 걸 그냥 풀어서 이야기합니다.
익숙한 세계관을 뒤집는 게 아니라 그걸 다시 풀어서 씁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계급에서 벗어날 수 없고 보다 상위계급에게 얹혀살거나 영원히 멸시당하며 산다...
이게 뭐가 무섭습니까? 안무섭습니다. 그건 이미 현실이니까.
이게 현실의 작동방식이기 때문에 안무섭습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착취나 지배를 뒤집어버릴 때 사람은 공포와 경이를 느낍니다.
아니면 그걸 잊고 살아가는데 다시 한번 일깨울 때 충격을 받습니다.
현실에서? 노동자들 일하다 죽어나갑니다. 임금체불 숱하게 일어납니다. 현실에서 국회의원이나 대기업 회장님들이 노동자들 멸시하고 강간하고 죽게 하고 이런 거 뉴스에 너무 자주 나옵니다.
그게 뭐가 무섭습니까?
계급전복은 불가하고 영원히 얹혀서 "기생"해야한다는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논리는 심지어 봉준호가 다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모든 걸 뒤엎는 전복의 시도를 "지하실에서 갇혀있다 탈출한 인간"으로 영화 속에서 한번은 보여줬습니다.
그걸 분식집 아들과 맹한 레즈비언이 섹스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보여준다고 뭐 새롭겠습니까...???
당연한 걸 안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히든 페이스]는 새롭지 않습니다.
이미 같은 이야기를 내놓은 같은 나라의 걸작이 몇년전에 있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 완성된 영화를 가지고 관객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건 사실 세상 속편한 소리이고 남의 바둑 훈수두는 짓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만...
영화가 끝나고 너무 아쉬웠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었는데 그걸 너무 뻔하게 그리거든요.
이를테면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관음이 가능한 비밀방의 구조입니다.
수연은 미주와 성진이 섹스하는 걸 목격하게 됩니다.
수연이 이걸 엿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더 흥미롭게 생각했던 건, 이 관음이 강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수연이 안볼려고 하면 안 볼수 있습니다. 괴로운 일이죠.
그런데 수연은 그걸 다 봅니다.
배우자의 불륜섹스는 목격하는 게 너무나 괴롭고 파괴적인 일인데 왜 인간은 그걸 굳이 자처할까...
혹은 미주가 그 관음이 가능한 구조를 이용해서 자신이 성진과 섹스를 했는지 안했는지 수연을 헷갈리게 하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미주가 안방에서 성진과 애무를 하다가 정작 섹스는 거실에서 하자고 설득을 한다면?
거울에 비치는 게 부끄러우니 그걸 좀 가려놓자고 한다면?
그러면 수연은 그걸 보고 싶어할 것입니다. 제일 보기 싫은 장면일텐데도.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미주가 수연을 폭력적으로 길들이는 와중에도 서로 긴장한다거나, 성진이 눈치는 채지만 아예 수연에게도 그걸 감추면서 복수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조금 더 은밀하게 진행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영화는 전체적으로 모든 걸 까놓습니다.
관객과 게임을 안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에로틱함은 보는 게 아니라 볼 수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때 작동합니다.
이 영화가 에로틱함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이해는 하겠지만 그렇게 찍은 것도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 제가 또 느끼는 이 영화의 문제는, 상상력의 빈약함에 있습니다.
그 전에 먼저 말하고 싶은 건 조여정씨가 연기한 수연이란 캐릭터가 제가 알던 사람과 굉장히 흡사했다는 게 흥미로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생충]에서 조여정이 연기한 대치동 사모님이 자신들의 직간접적인 경험 속 인물들과 너무 똑같아서 감탄했다고 말하더군요)
제가 아는 사람도 집이 태생적으로 부자고 예체능계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알부자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이 있습니다. 그건 자수성가로 이룰 수 있는 규모가 아닙니다)
제가 그 지인을 통해 충격을 좀 받았던 건, 부자들은 의외로 큰 물욕이 없습니다.
갖고 싶은 건 다 갖거든요. 가질 수도 있고요. 집착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집착은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결핍이 크지 않으면 집착도 없습니다.
가질 수 있으면 당연하게 갖고, 못가지면 아~ 아깝다 하면서 "다음"을 노립니다.
다음에, 다른 거 가지면 되니까요.
저희같은 서민들이나 블랙프라이데이세일! 무슨 쿠폰! n % 할인 쿠폰! 이러면서 목을 멥니다.
모든 부자가 이런다는 건 아닙니다만 아무튼 그 지인의 세계관 속 풍요와 결핍은 서민인 저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부자들도 띠부띠부씰이나 한정판에는 환장할 수 있지만, 아무튼 그 난이도가 일반 사람의 것과는 좀 다릅니다.
물론 여기에 붙여야 될 단서는, 재물에 대한 물욕과 "자본에 대한 집착"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이 영화의 결말이 뭐가 짜치냐면, 수연이 미주를 그렇게 방에 가두고 노리개로 쓴다는 게 인간관계에 되게 목마른 사람이나 할 법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수연은 일종의 싸이코패스죠. 자신의 언행이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 들릴지 그걸 잘 상상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타인을 자신의 인생의 들러리로만 보거든요.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도 말하죠. 너도 나한테 도구였고 나도 너한테 도구였다고.
(제가 아는 지인도 사람을 너무 필요에 의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본인 기분이 젤 중요하니까.)
수연의 행위를 봅시다.
사람을 지하실에 가두고, 그걸 비밀로 유지하고, 심지어 그 비밀을 아는 사람도 또 있고, 그 감금공간이 프라이빗한 자기 집입니다.
그리고 미주는 수연의 인생에서 가장 크게 뒤통수를 쳤던 위험인물이고 곁에 두면 어떻게 또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인간입니다.
심지어 그 집에는 한때 공범이었던 성진도 같이 거주합니다.
뭐하러 이런 위험상황을 초래하면서 미주를 가둬놓습니까...?
누굴 감금하고 그 사람을 먹이면서 사는 거, 생각보다 되게 피곤하고 귀찮은 짓입니다.
집착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애정과 책임이 소요되는 상태입니다.
이를테면 아들한테 몰입하는 한국의 어머니들, 바깥에서 보면 이상할 정도의 집착입니다.
애완동물 키우는 것도 되게 노동입니다. 그러니까 애완동물을 함부로 파양하고 죽이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을 그렇게 가둬서 키운다고요?
수연이 왜요...? 미주는 자신한테 싸가지없게 개겼고 최악의 굴욕을 안겼고 이제 완전히 믿을 수가 없는 존재인데?
성진이 수연한테 뽀뽀를 하고 나가자 수연은 자신의 볼을 벅벅 닦죠. 더럽다는 듯이.
그런데 미주의 애무는 받고 싶을까요?
자기애로 가득찬 인간이, 자기를 깨물었거나 질리게 한 햄스터를 열심히 키우겠습니까? 벌을 준다면서 계속 키울까요? 아니면 그냥 버리거나 죽여버리고 다른 애를 새로 키울까요?
수연이 알게 모르게 외로워하고 의존할 수 있는 타인을 찾고 있다는 그 심리적 결핍을 그려놨다면 차라리 이해라도 가겠습니다만 영화는 그런 게 없습니다.
제가 경험한 지인을 참조했을 때, 자본주의의 풍요에 익숙해진 사람은 인간관계도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 사람이 나랑 잘맞고 오래 잘 지냈으면 좋겠지만 수틀리게 하면 바로 절교다...
왜냐고요? 다른 모든 게 풍요롭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외로움의 악순환에 계속 빠집니다.
수연이 미주를 죽여버리면 죽여버렸지, 저렇게 곁에 두고 책임지면서 살려둘 이유가 없습니다.
완전 정떨어졌을테니까.
계속해서 살려둔채로 괴롭히고 괴롭힌다?
미주나 성진이나 수연이 살아서 그 방에서 나오면 자신들을 가만 두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수연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뭐하러 이 두 "년놈"을 싫어하는데도 살려두고 옆에 둡니까?
지배하는 게 좋아서...?
이게 바로 피지배자의 헛된 상상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지배하는 게 익숙한 사람들, 풍요가 익숙한 사람들은 결핍을 잘 상상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라도 바로 치워버립니다.
그런데 지배가 익숙치 않거나 결핍이 늘 바탕에 깔려있는 서민들은 그런 걸 상상하죠.
약하고 힘없는 우리를 계속 괴롭힐 것이라는, 악의 섞인 '집착'을 상상합니다.
아뇨. 집착 안해요. 별 또라이 새끼들을 다 봤다면서 진절머리 치고 잊어버릴려고 할 것입니다.
자기를 감히 해하고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 상대에게 자기 성기를 핥게 하고 싶을까요? 감히? 자기 성기가 소중하고 프라이빗한 건데도?
이런 게 포르노적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성적으로 능욕하는 데서 지배권력을 충족하는 것 말이죠.
포르노는 현실에서 섹스를 못하는, 섹스의 불만족이 큰 사람들이 보는 것입니다.
수연이 돔과 서브로 일컬어지는 관계에서 도미넌트로서 성적 만족을 추구하면 밖에서 이쁘고 순종적인 "새 파트너"를 구하면 그만입니다.
(저는 이 영화의 이런 설정이 '레즈비언들은 아주 비밀스러운 성애를 나누는 사람들이다'라는 퀴어에 대한 편견이 섞여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뭐하러 싸가지없게 개긴, 세상물정 모르는 얼간이 천치를 도구로 씁니까? 그건 고장난건데?
이런 게 이 영화가 좀 궁핍해보인다는 것입니다.
풍요롭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상상을 못합니다.
상대에게 집착하고, 그 상대를 평생동안 괴롭힐 것이라는 헛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바이브레이터가 고장났는데 그걸 고장난채로 계속 옆에 두고 채찍질하면서 쓸까요?
그냥 버리고 새걸 구하겠죠.
반대로 이 집착을 훌륭하게 표현한 다른 한국영화가 있습니다.
임상수 감독의 [돈]입니다.
- 좀 초고 느낌으로 거칠게 썼지만 제가 이 영화에 갖는 대략적인 불만을 이렇습니다.
계급의 이야기를 동어반복을 한다
익숙한 세상진리를 충격적인 각성제인 것처럼 꾸민다
지배계급의 마인드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런데 쓸데없이 포르노적이다...
개개인의 감상은 자유이고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저는 이런 이유로 이 영화에 크게 불만족했습니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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