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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사랑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채플린의 말을 인용하여 이 영화를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그만큼 23살 청춘이 겪는 격렬하고 냉혹한 사랑의 열병을 희비극을 오가며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각 시퀀스의 기승전결과 시퀀스들의 연결이 참으로 유려합니다. 로맨틱 코미디, 소동극, 추적극, 로드무비, 청춘물, 성장물의 여러 장르를 활기차게 넘나들며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하는데요. 촬영, 편집, 음향이 잘 어우러져 탄탄한 만듦새를 자랑합니다. 배우들을 프레임 안에 조밀하게 배치하며 효과적인 앙상블을 이끌어내는 감독의 능력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이 떠올랐구요. 아이러니 속에서 욕구가 서로 다른 캐릭터들끼리 충돌하는 가운데 웃음을 유발하는 왁자지껄한 소동극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진 감독의 예전 작품들도 연상되었습니다.
후반부로 향할수록 전형적인 막장 K-드라마의 정서도 흐르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영어 욕설과 러시아어가 난무하는 와중에도 묘하게 친근감이 듭니다. 철없는 재벌 2세와 가진 것은 없지만 꿋꿋하고 당찬 캔디같은 여주인공, 그들을 둘러싼 편견 어린 시선들과 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돈 많은 나르시스트 부모, 그리고 그녀의 짠내 나는 사랑을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비슷한 출신 배경의 남자까지.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임에도 시종일관 주인공 애니를 응원하게 되고 함께 분노하게 되며 마침내 그녀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콧등 시큰한 페이소스까지 전해지게 만드는 데는 미키 매디슨의 매력과 열연이 큰 몫을 합니다. 그녀의 얼굴과 몸짓에서 뿜어내는 모든 희노애락의 감정들이 곧 영화의 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화에 호소력을 불어넣으며 타이틀 롤을 탁월하게 소화합니다. 특히 청혼하는 이반을 바라보는 그녀의 촉촉하고 미묘한 눈빛과 처음 만난 이반의 부모에게 조심스럽지만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할 때 미세하게 떨리던 그녀의 입가에서 (아마 처음일지도 모르는)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정이 절절하게 묻어나와 괜스레 설레었으며, 믿었던 사랑이 끝내 등을 돌렸을 때 배신감과 허탈감에 휘청거리면서도 못내 아닌 척을 하던 그녀의 쓴 웃음은 제 가슴까지 후벼팠습니다.
이혼을 위해 라스베가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엄마와 다투던 이반을 향해 "너같이 한심한 녀석과 이혼하길 잘했다!"며 빅엿을 날린 후 자리로 돌아온 애니에게 마치 '잘했어! 한잔 해~'라고 다독이는 듯 이고르가 무심하게 위스키를 건네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데요. 드라마적 쾌감과 동시에 비극적 상황을 유머로 승화시키는 듯한 위트가 느껴집니다.
극중 애니와 이고르의 관계, 그리고 엔딩에서 영화 <밀양>도 오버랩되었습니다. 사랑의 열기가 일장춘몽처럼 사라져버린 후, 그 시린 자리에 잠잠히 감도는 밀양(Secret sunshine)의 온기와 같은 이고르의 사랑이 애니의 불꽃같은 사랑과는 또다른 결의 울림을 전해줍니다. 혼자 빛나는 별은 결코 존재하지 않듯이, 어쩌면 '빛'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노라'를 진정으로 빛나게 해줄 존재가 이고르일지도 모르겠네요. 햇살에 차디찬 눈이 녹듯 사랑은 다시 또 오니까...
영화는 이처럼 제 멋대로 왔다가 제 멋대로 떠나가버리는 사랑의 모순과 그 앞에서의 좌절, 그리고 위로와 희망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캐릭터상의 두 가지 특이한 설정이 눈에 띕니다. 첫째는 자본주의 국가의 대명사인 미국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는 이민 2세들을 내세운다는 점이고, 둘째는 주인공의 직업이 성노동자(스트립 댄서)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설정들이 나름의 극적 효과를 발휘합니다. 유사한 출신 배경을 가진 캐릭터 간 동질감 형성에 용이하다는 점, 사회적으로 괄시를 받는 직업이 자연스럽게 사랑의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점 등을 볼 때 서사 내에서 필연적인 설정으로 기능하는 것 같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것에서 한 발 더 들어간 영화적 깊이까지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특히 애니가 성노동자라는 설정은 소재의 화제성 확보 및 자극적 묘사를 위한 타당성 획득, 그리고 캐릭터를 타자화된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에 그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가령 주인공의 직업이 뉴욕 스트립 클럽 댄서가 아니라 맥도날드 아르바이트생이었다 할지라도, 찌질한 마마보이 잘못 만나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 순진한 청춘의 사랑과 소동을 그린 이 영화의 대략적 얼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뿐더러 감정적 설득력 또한 유효했을거라는 생각이 한편으로 듭니다. 이 영화가 갖추어야 할 시사적 기능의 측면에서도 주인공이 "노동자"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성"노동자라는 사실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어차피 성노동자의 삶을 작심하고 디테일하게 포착하는 리얼리즘 영화도 아니라면 '굳이?'라는 의문이 찝찝하게 남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두 번을 보아도 영화가 발산하는 에너지와 기저에 깔린 시선 사이에서 미묘한 양가감정이 들긴 하나 어쨌든,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만큼 2024년을 대표하는 특별한 작품이라는 생각까지 들진 않지만 여러모로 준수하고 매력적인 청춘 영화, 사랑 영화라 평가하고 싶습니다.
☆별점 및 한줄평:
●●●○(3.5/5) 사랑..그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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