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국영화 베스트 10 (영화평 포함)

제가 이번 년도에도 해외에 있는 만큼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를 많이 보지 못 했습니다. 확실히 유럽에서 극장 개봉되는 신작 한국영화가 잘 없어서 영화제를 통하거나 VPN을 이용하여 겨우 챙겨보아야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놓친 작품들이 많이 있을 거라는 아쉬움 때문에 결산이라는 표현은 쓰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본 신작 한국영화 중애서 좋았던 10편의 작품들만을 꼽아보았습니다.
순위를 내림차순으로 정렬하겠습니다.
10위. 수유천
<수유천>은 최근 홍상수 영화 중에서 가장 특이한 발걸음을 하고 있는 듯한 작품입니다. 한국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홍상수 영화는 없었던 거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인물의 설정으로 등장하며 정치적인 코멘트를 영화에 담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지난 홍상수 영화에서 보여왔던 것들이 퇴적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퇴적이 한국의 사회라는 현상과 반응하여 하나의 영화적 세계로 투명하게 총체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영화를 불투명하게 만들어버려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그래도 매번 다른 형식을 보이는 홍상수 감독이니 만큼 다음 작품은 어떤 길로 나아갈 지 기대를 품게 됩니다.
9위. 리볼버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이 영화가 장르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다양한 떡밥들이 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그 떡밥들은 이야기 안에서 해소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오로지 자신의 돈을 받는 데만 관심이 있는 인물이라 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들은 자신의 관심 사항에 두지도 않죠. <리볼버>가 웰메이드 영화냐?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영화를 지지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실패를 의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의 자리, 진실도 감정선도 비장미도 모두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있는 장르의 공터를 영화는 허무의 정서로 기묘하게 뒤덮고 있습니다. 훌륭한 촬영과 연기가 만드는 이 서늘한 정서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8위.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아마 올해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귀여운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해요?"라는 실존적 질문에 상상은 어떻게 답변할 수 있을까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의 상상력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하기에 아주 적절할 것입니다. 질문을 요구하지 않는 교육을 시행하고 획일적인 삶의 모습을 추구하는 당위에 종속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 영화의 엉뚱한 상상력은 그 자체로 눈이 뜨이게 하는 신선함을 가지고 있고 한국에서의 실존을 관객들로 하여금 깨우치게 합니다. 이 영화 안에서 여러 작은 공상들이 연쇄가 되는데 그렇게 만들어지는 유니버스는 우리가 이 당위의 부조리를 견디게 하는 위로를 해줄 정도로 우주적인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7위. 더 킬러스
아마 올해 한국영화중 가장 스타일리시한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과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그리고 심은경. 이 세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4명의 감독이 각자만의 해석을 담아 만든 4개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죠. 어떤 단편이 좋았는지에 대한 비교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본의 제약 없이 공유된 모티브들이 이 네 감독의 창작 과정에서 어떻게 서로 다르게 화학작용을 일으켰는지를 볼 수 있는 스타일들 그 자체로 흥미롭고 재밌는 작품입니다. 스타일의 파노라마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6위. 핸섬가이즈
저는 <핸섬가이즈>가 매우 잘 만든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원작의 현지화를 센스 있게 잘 했기 때문입니다. <핸섬가이즈>의 원작은 캐나다 영화인 <터커 & 데일 Vs 이블>이죠. 이 영화는 슬래셔 영화의 클리셰를 전면적으로 비틀고 패러디하는 영화입니다. 슬래셔 장르가 미국적인 풍경에서 발전된 만큼 이 원작도 미국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패러디하는 작품인데요. 유머도 그래서 미국적입니다. 따라서 리메이크 과정에 있어 원작의 미국적인 느낌을 어떻게 한국 배경으로 바꾸고 유머들을 한국 대중의 취향에 맞추어 현지화할 것인가가 관건이었을텐데 <핸섬가이즈>는 그것을 잘 수행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죠. 그 현지화가 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성민과 이희준의 기깔나는 연기의 몫이 클 것입니다. 배우들의 앙상블이 만드는 유머도 좋고 특히 사투리 연기는 이 영화의 톤을 완벽하게 잡아줍니다. 남동협 감독은 원작에 없는 미국 오컬트 장르를 가지고 와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데 결과적으로 토속적인 느낌과 이국적인 느낌이 공존하며 볼거리도 다채로운 그런 뛰어난 코미디 영화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5위. 벗어날 탈 脫
<벗어날 탈>은 최근 한국 영화에서 상당히 보기 드문 스타일을 가진 작품입니다. <만다라>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비슷한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마치 저에게 하나의 우주적 고리로 다가옵니다. 이 영화에서 실존적 번뇌와 창작의 고뇌가 마주하면서 삶과 죽음, 움직임과 정지 등 서로 대비되고 것들이 뒤섞인 시간 속에서 결국에 서로 맞닿고 순화하는 일종의 신비가 만들어집니다. 그 신비의 영험함으로 가득한 그런 영화입니다.
4위. 장손
아마 한국인이라면 이 영화에 어떤 방식으로든 공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 가족 문화에 정을 느끼던가 아니면 그에 대해 염증을 느끼던가. 이 이중적인 감정을 다 들게 할 만큼 <장손>은 한국적인 영화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전통적 가족 문화의 부조리를 매서운 눈초리로 지적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라지고 죽어가는 과거의 것들에 대한 씁쓸한 장례를 치르는 듯한 이 영화는 매우 뛰어난 한국 가족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3위. 되살아나는 목소리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일제 강점기 당시와 전후에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박해를 받았던 재일조선인들의 기억과 민족적 정체성에 관한 영화이고, 그들의 기억을 통해 영화로 차별에 투쟁했던 한 재일조선인 여성감독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며, 그 기억을 기록하는 의무를 가진 예술가의 태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박수남 감독의 노쇠한 육체와 과거에 채증된 영상 기록과 증언을 포개면서 곧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는 과거의 목소리들을 공명시킵니다. 이 공명되는 목소리에서 망각에 대한 저항의 결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는 소수자 민족으로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연대를 바라는 사글한 목소리도 들립니다. 보고 나면 그 무수하게 공명하는 레이어들이 묵직한 감정을 남기는 작품이고 민족의 한 세대의 기억을 탐구하는 위대한 여정을 떠난 감독님에게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올해의 다큐멘터리라 평가받기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위. 여행자의 필요
저에게 올해 한국영화 캐릭터를 꼽으라면 단연 <여행자의 필요>의 이자벨 위페르입니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보여주는 공기는 정말 놀랍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지만 언어를 가로지르며 우리의 삶을 유랑하는 순례객의 느낌이 나는 이 인물은 <당신얼굴 앞에서>의 이혜영처럼 그 자체로 영화에서 오로지 자신만으로 어떤 지지대로 없이 스스로 지탱되는 존재처럼 다가옵니다. 영화에 인물의 과거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녀가 품고 있는 삶의 자그마한 생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그녀의 시적인 존재감은 아름답도록 투명합니다.
1위. 미망
이 작품은 시네필들의 베스트 리스트에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데요. (반면 씨네21에서 이 영화가 2024년 한국영화 베스트 7위에 선정되었습니다.) 저에게 올해 한국영화 중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작품이었고 때문에 저는 이 작품을 당당히 1위로 꼽겠습니다. 다만 제가 1위로 꼽은 데에는 감상적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받았던 감동은 이 영화가 가진 구조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서울의 종로라는 공간과 그 안에 퇴적되고 흐르는 시간을 포착하는데요. 서로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애틋하고도 멜랑콜리한 감정들과 그들의 삶의 모습에 도시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자연스럽게 포개면서 영화는 일상적인 공간을 다르게 바라보게 할 뿐더러 흐르고 변화하는 삶의 감정들을 부드러운 표현으로 담아내고 삶과 도시의 변화가 일으키는 미묘한 향수까지 다층적이고 시적으로 담아냅니다. 변했지만 그대로인 것과 그대로지만 변한 것이 주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서로 깊게 공명하는 영화적 레이어는 저의 감정을 깊숙한 곳으로부터 끌어올렸습니다. TMI로 <미망>은 김태양 감독이 4년에 걸쳐 연출한 단편영화 세 편을 엮은 작품인데 그 제작기간 4년(?)이라는 물리적 시간 사이에 실제로 일어난 변화들이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기면서 이 영화의 주제를 깊게 만들기도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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