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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의 정령>은 1940년, 스페인 카스티야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5살 소녀 '아나'가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본 뒤 현실과 영화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며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아나'의 언니인 '이사벨', 아버지 '페르난도', 어머니 '테레사'로 이루어진 가정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보여줍니다.
대사량이 적고 은유가 많은 작품이라 복기해볼 겸 기록하는 글을 남겨보려 합니다.
1. 1940년대의 스페인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시대적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벌집의 정령>을 보고 아리송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작품의 은유적인 면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극중 배경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었기 때문일 확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벌집의 정령>은 1940년의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군부 세력이 '프랑코 체제'를 세웠고,
1939년에는 스페인 전역을 장악하여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할 때까지 독재를 해먹었습니다.
극중 배경이 되는 1940년의 스페인이라면...
스페인 전역이 군부 세력에 장악당한 뒤 독재가 시작된 거의 첫 해라고 봐야겠죠.
2. '벌'과 '벌집' - 프랑코 독재 정권
'아나'의 아버지인 '페르난도'는 양봉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페르난도가 벌집을 들어올려 확인하는 장면이 이 영화 속 페르난도의 첫 등장 씬입니다.
자신이 착취하는 벌들과 그 벌들이 사는 벌집을 확인하는 거죠.
여기서 '벌'과 '벌집'은 각각 '국민'과 '프랑코 독재 정권 하의 스페인'을,
벌집을 확인하는 페르난도의 모습은 독재자 프랑코를 연상케 합니다.
또한 이 벌집은 '아나'의 집 창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벌집 모양의 창문으로 햇살이 비쳐들며 노란빛이 방 안을 채우는데,
페르난도, 테레사와 같은 어른들이 상당히 무기력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프랑코 독재 정권이라는 거대한 벌집 안에서 무기력하게 움직이는 국민들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집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그 거대한 벌집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만 여전히 벌집 안에 있는 듯한 연출은
마치 프랑코의 독재를 벗어날 수 없는 억압된 국민들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3. 단절된 가족
프랑코 독재 정권 하에서 여성들은 독립적인 재산권, 정치적, 법적 권리를 심하게 제한당했고,
여성들의 일과 경제 생활은 아버지와 남편이 관리해야 했습니다.
앞서 벌들을 착취하는 페르난도를 보고 프랑코의 모습을 떠올렸는데,
가정에서는 페르난도의 가부장적인 면모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페르난도가 처음 테레사를 찾는 장면에서는 격앙된 목소리로 그녀를 부릅니다.
테레사가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에서는
페르난도가 침실로 들어오자 등을 진 채 돌아누워 자는 척을 합니다.
영화의 후반부, 이 가족이 유일하게 한 공간에 모인 장면인 식사 장면.
카메라는 한 프레임에 네 명의 가족을 모두 담지 않습니다.
페르난도 / 테레사 / 아나 & 이사벨로 나눠 담죠.
영화에서 흔히 인물 간의 심리적 거리감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게다가 애 아빠가 애들 앞에서, 그것도 식사 중에 담배를 뻑뻑 피는데
여기서도 테레사는 페르난도의 눈치만 보며 묵묵부답이고,
이사벨과 웃음을 주고받던 아나는 화가 난 아버지의 모습에 얼어버립니다.
극중 페르난도의 아내인 테레사가 페르난도에게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는 장면이 있었나요?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단절된 가족의 모습은 프랑코 독재 정권이 펼친 성차별적인 정책의 산물이겠죠.
4. 내전의 비극
사실 위에서 언급한 가족의 단절에는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테레사가 내전으로 인해 사랑하던 애인을 멀리 떠나보내게 된 것이죠.
그렇게 프랑코 정권이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의 강화를 불러일으킨 상황에서
페르난도와 울며 겨자 먹기 식 결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소통 방법이 편지뿐이기에 테레사는 열차를 이용해 편지를 부칩니다.
여기서 열차 안에 타고 있는 남자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우수에 젖어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극단적인 탄압을 받는 암울한 세태임이 그들의 눈빛에서 드러납니다.
영화의 후반부쯤 접어들게 되면
애인의 소식을 듣기 위해 희망을 담아 편지를 부쳤던 테레사가 편지를 태워버리는 장면이 등장하고
이후 더 이상 테레사가 애인을 그리는 듯한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프랑코 독재 정권에 굴복해버린 국민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5.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빅토르 에리세의 영화
순수한 아나는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나름의 충격을 받는데,
언니인 이사벨의 말을 듣고 정령의 존재에 대해 믿기 시작하죠.
아나가 일상에서 마주한 순간을 통해 그 믿음은 극대화되고 점점 현실과 허상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철로에 귀를 대고 소리만 듣다가 다가오는 열차를 마주했을 때의 압도감,
촛불을 켜고 그림자 놀이를 했을 때 그림자의 이미지,
이사벨이 죽은 척하고 사라진 후 프랑켄슈타인 같은 분장을 한 채 등장해 놀래키는 장난,
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돈 호세 모형의 이미지,
(*오페라 '카르멘'에서 성실하고 명예로운 군인이었다가 이성을 잃고 폭력적으로 변하게 되는 캐릭터의 이름도 '돈 호세'라는 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모닥불 위로 점프하며 다소 위험해 보이는 장난을 치는 아이들의 모습,
우물 앞 거대한 발자국까지.
그러다 아나는 창고에서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위의 경험을 거친 아나는 그 남자를 자신의 정령이라고 믿었는지
자기 아버지의 옷을 가져다주고 신발끈을 묶어주며 친절을 베풉니다.
하지만 간밤에 그 남자는 총살당하게 되고 날이 밝은 후 아나는 그 남자가 있던 창고로 다시 찾아갑니다.
그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그 남자가 있던 자리엔 혈흔만이 남아있습니다.
아나의 순수함과 세상의 잔혹함이 처음으로 충돌하는 구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빅토르 에리세 영화의 정수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벌집의 정령>에서 최초의 영화라 불리는 '열차의 도착'을 레퍼런스로 하여 만든 씬을 보고 나면,
영화에 대한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애정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빅토르 에리세에게 영화란 어떤 존재일까요?
영화는 기본적으로 허구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빅토르 에리세의 영화는 그런 식으로 현실을 외면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서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영화라는 허구가 가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과 힘을 느끼게 합니다.
영화의 엔딩에 다다르게 되면, 충격적인 경험을 한 아나는 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밤중에
다시 자신의 정령을 만나고 싶어서 창문을 활짝 열고 주문을 외웁니다.
"나야, 아나."
그리고 뒤를 돌자 하얀 달빛 아래,
정령이 나타나길 기다리는지, 나타난 정령을 보고 있는지 모를 아나의 모습을 비춰주며 영화는 끝이 나게 됩니다.
저를 포함한 몇몇 관객들은 내심 정령이 등장하는 모습을 기대했을 겁니다.
이 영화는 아나가 내내 정령을 찾아다니는 내용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빅토르 에리세는 그렇게 쉽게 기적을 보여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오히려 이런 엔딩 방식을 통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과 가능성을 믿어보고,
우리 나름대로 상상해보고, 기대해보게 됩니다.
이것이 영화를 영화 속에서 끝내지 않고,
관객에게 고스란히 안겨주는 빅토르 에리세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극중 아나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드는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벌집의 정령> 관련 인터뷰 내용을 가져오며 글을 마칩니다.
"예술 작품이 영원한 이유는 그것이 그 작품 뒤에 있는 사람의 삶, 그 삶의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영화관에 간 건 다섯 살 때였습니다. 그건 정말 충격적인 경험이었죠. 저는 <벌집의 정령>에 나오는 아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공포의 경험, 완전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제가 본 영화는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로이 윌리엄 네일의 <주홍빛 발톱 The Scarlet Claw>(1944)이라는 셜록 홈즈 영화였지만, 그 경험은 아주 비슷했습니다. 그때는 1946년, 전후 유럽이었고, 풍경은 완전히 폐허 상태였습니다. 나라와 도시의 거리에서 저는 이 공포의 직접적인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스페인 내전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도 포함된 일이었습니다.”
사진 출처 : 유튜브 <벌집의 정령> 공식 예고편
영상 출처 : 엠엔엠인터내셔널 인스타그램
인터뷰 내용 출처 : 엠엔엠인터내셔널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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