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속 열람 하시겠습니까?
나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내 인생에는 영화와 종교, 이 두 가지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종교 영화의 최고작으로 꼽는 <사일런스> 시사회 당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했던 말입니다. 이 말은 제 삶에도 고스란히 해당됩니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더 잘 할 수 있을까' 평생 열렬하게 고민했던 두 가지가 저에겐 바로 연기와 신앙입니다. 유년 시절 나르시시스트 성향이 다분한 부모님의 학대와 사춘기 시절 잔혹한 학폭에 심신이 짓밟혔던 저로서는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란 왜 이다지도 고통스러운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연스레 맞닥뜨렸고 그 답을 종교에서 찾아보려 애썼습니다. 한때는 불교적 세계관에 민족 종교가 결합된 원불교 성직자의 길을 갈 뻔 하기도 했었으나, 나 스스로의 힘으로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번뇌를 해결해야 하는 것에 한계를 느껴 절대적인 존재를 찾아 개신교에 귀의하였습니다. 허나 단순히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성령이 함께하고 구원 받는다는 논리가 좀처럼 납득되고 체득되지 않아 고민하던 중 대한민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이비 종교인 신천지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무려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신천지에 갈아넣었죠. 열정 넘치는 배우지망생이기도 했던 제가 이렇게 종교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 왔던 가장 큰 이유는 "신의 뜻"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이 너무나도 나약하고 곤고하며 추악한 존재임을 일찌감치 자각했던 저로서는 "좋은 배우" 이전에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열망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어찌보면 목숨보다 중한 요소로 제 삶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신이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기에, 그저 그 분의 뜻을 막연하게 더듬으며 삶이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불확실성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때론 신의 뜻을 오해하며 시행착오를 겪거나 시험에 들며 혼돈의 늪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고충입니다.
의심과 확신 사이, 신의 뜻을 구하는 삶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22:1~2)
금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한 영화 <콘클라베>의 주인공 로렌스 추기경 또한 신앙적 고충에 처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신의 뜻을 찾고 두드리며 행하려 몸부림치는 인간의 연약함을 굉장히 격조 있게 그려 냈다고 생각합니다. 로렌스는 로마 교황청에서 추기경단의 단장직을 맡고 있는 신앙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같은 고위 직책에 회의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 자신의 신앙에 위기감을 느끼며 바티칸을 떠나 수도원에 가서 조용히 해답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의 신앙적 고민은 바로 “기도”인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신의 뜻을 헤아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입니다. 때론 신의 응답에 의구심을 품으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자신의 모습 앞에서 탄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스스로 영적 깊이가 부족하며 고위 직책을 맡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기도를 신과 같은 절대자에게 소원을 간구하는 행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기도는 신의 뜻을 구하고 따르기 위한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신약 성경의 주기도문에서는 '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라고 하는데요. 즉 기도란 나의 뜻을 일방적으로 구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신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에는 신께 기도할 때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면 이루어주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조건 믿고 구하기만 하면 내 소원을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뚝딱 이루어준다는 뜻이 아니라, 온갖 시험을 극복하고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지혜"를 구하라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결국 신의 뜻은 인간의 손을 빌어 성취되니까요. 아울러 신의 뜻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닌, 신은 인간이 그의 뜻을 따르고 실현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는 분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영화 내내 로렌스는 이처럼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고뇌하고 갈등하며 기도합니다. 그의 관심과 목적은 오직 신의 뜻에 합당한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것이지만, 투표권을 가진 108명의 추기경들 중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가 몇이나 될지 의문입니다. 저마다의 이권과 신념들이 개입되어 충돌하는 사흘 간의 여정을 이끌며 로렌스는 쉬지 않고 신의 뜻을 "의심"하는데요. 이는 신의 뜻을 함부로 확신하지 않고 항상 겸허한 자세로 의심하고 자문하는 가운데 그 뜻을 구하며 신중하게 직무를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교황을 선출하자는 그의 설교에서도 드러납니다. 신약 성경 에베소서를 인용해 포용과 화합을 권면하는 메시지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듯 하나,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선거는 점차 정치적인 싸움으로 번져 갑니다. 흔히 선거 때 마다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하라'는 말을 되풀이하곤 하는데요. 주변의 동요와 조언에도 아랑곳 않고 로렌스는 "차악"이 아닌 "최선"을 찾으려 노력할 뿐입니다. 여러 면에서 랄프 파인즈가 분한 로렌스를 보며 영화 <미션>의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스 분)가 떠올랐는데요. '우리가 믿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신'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그의 대사와 로렌스의 두 눈에 가득한 고뇌가 일맥상통해 보입니다. 따라서 로렌스에게 있어 의심이란, 인간의 신념과 판단을 신의 뜻으로 착각하며 확신하는 것을 경계하는 이성적인 수단인 동시에 자신이 맡은 직무를 완전하게 수행해 내기 위한 절실한 기도의 연장선, 나아가 한 점 부끄럼 없는 신앙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의로운 발걸음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심정으로 느리지만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사람이 바로 로렌스인 것이죠. 흡사 거북이처럼 말입니다.
신천지가 신의 뜻이라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람을 세뇌시켜 가출이나 이혼을 조장하는 사기 집단이 아닌, 일반 개신교 교회에 비해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고 신앙의 개념을 바르게 정립시켜 준다는 메리트 때문에 전도되어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 또한 그러했으나 초반에 그 실체를 공개하지 않고 전도하기에 내가 가고 있는 곳이 신천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신천지는 사탄 들린 이단 중의 이단, 사이비 종교의 끝판왕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허나 전 언론을 비롯한 다수의 인식과 평가를 냉정하게 의심해 보았고 인간의 시각에서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섣불리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저 신 앞에 무릎 꿇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만약 이곳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언제든 제 발걸음을 돌이켜 주세요." 그렇게 저는 맹목적인 확신 대신 의심을 멈추지 않고 신의 뜻을 간구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요. 결과적으로 신천지의 교리에서 아무리 봐도 조작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들을 발견하고는 거듭거듭 확인한 끝에 제 발걸음을 미련 없이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신천지에서 여러 직책을 맡으며 혼신을 다해 일했습니다. 되돌아보면 그래도 나름 의미있는 경험으로 기억되는 직무는 타종교와의 교류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했던 일인데요. 당시 친분이 있던 이슬람교 성직자(이맘)께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신앙은 결코 강요될 수 없다. 그저 본인이 가장 납득되는 것을 선택하여 믿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당장 1분 뒤 자신의 미래도 알지 못하는 한낱 인간이 어찌 신의 뜻을 확신하며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한 길 자신의 마음 속도 다 들여다 보지 못하는 인간의 좁은 눈으로 어찌 하늘을 다 헤아려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의심을 배제한 확신이야말로 어쩌면 자기자신과 주변인들을 소경으로 만들어 영원히 구덩이에 빠지게 만드는 지름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사이에서 선택(Choice)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기에, 선택의 여지 자체를 차단하는 확신 혹은 맹신은 신앙의 가장 위험한 적입니다. 개인에게도 공동체에도 말입니다. 반면 의심이야말로 무한한 선택의 순간을 제공하며 손을 잡고 정도를 걷게끔 도와주는, 신앙의 가장 믿을만한 친구입니다. 고로 의심을 통해 신앙은 살아 숨 쉬게 됩니다.
영화 속 로렌스의 이름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로렌스의 여러 이름들입니다. 먼저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살펴 보죠. 토마스의 히브리식 이름은 '도마'인데요. 도마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이며 의심 많은 신앙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요. 방문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며 순간 이동하는 예수님을 보고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 기절초풍했죠.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친히 손의 못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자신을 믿게 하였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해 들은 도마는 자신이 직접 보고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문을 제기하며 의심합니다. 이런 도마를 위해 예수님은 다시금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시죠. "내 손과 옆구리에 네 손가락을 넣어 보고 믿어라." 즉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책망하기보다는 타당하게 여기시고 그가 신의 뜻을 한층 굳건하게 믿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니다. 결과적으로 도마는 머나먼 인도까지 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다가 순교했는데요. 이렇게 의심과 질문, 그리고 확인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는 도마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작중 의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로렌스 추기경의 이름을 설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로렌스가 가진 캐릭터의 결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불리기 원하는 이름인 '존'(히브리식 이름은 요한)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의 성품이나 교회 내에서의 위치를 보았을 때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등을 집필한, 일명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사도 요한과 상당 부분 흡사합니다. 사도 요한은 스스로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칭했을 정도로 예수 생전에 가장 총애를 받고 항상 그의 곁을 보필하며 많은 일들을 담당했던 제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오죽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나타날 징조에 관한 비밀을 요한에게 보여 주고 기록(요한계시록)하게 할 정도로 예수의 분신과 같은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렌스 역시 선종하신 전임 교황이 유일하게 믿고 콘클라베를 지휘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길 만큼 순수하고 온유하며 정직한 인물입니다. 권위에 도취되지 않고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형제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모습 또한 그가 가진 미덕입니다. 과거의 사생활 때문에 교황 선출의 문턱에서 자격을 상실한 아데예미의 손을 붙잡고 그가 낙심하지 않도록 위로하는 모습에서 별다른 야망도 없고 정치적 입김도 행사하지 않는 그에게 왜 표를 던지는 지지자들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전임 교황이 수많은 추기경들 가운데 가장 총애하는 인물이 로렌스였던 것이죠. 한편 로렌스에게 전임 교황은 마치 예수님과 같은 신의 대리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자신을 향한 신의 뜻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어 고심하는 그로서는 교황의 명에 순종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죠. 단장 직책을 사임하려는 자신의 뜻마저 교황의 반려에 순순히 꺾을 정도로 교황은 절대적인 멘토이자 존경하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제 홀로 남겨졌습니다. 목자 잃은 어린 양처럼 말입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다른 추기경들과 달리 교황의 주검 앞에서 소리 없이 울던 그의 눈빛이 유독 투명하고 슬퍼 보였는데요. 중반부 고인의 방에 다시 들어가 생전에 쓰셨던 안경을 집어든 채 서럽게 오열하는 그의 모습에 저 또한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스승이 떠나신 후 끝없는 종교적 박해 속에서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다 붙잡혀 끝내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된 채 상심에 빠져 있었을 사도 요한의 처연한 모습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래전 언젠가의 제 모습이 보였는지도요.
콘클라베 기간 동안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교회의 명예와 돌아가신 스승의 의중에 초점을 맞추어 판단하고 처신하던 로렌스는 유력한 교황 후보 중 한 명인 트랑블레 추기경을 향한 신의 뜻에 의심을 품고 갈등합니다. 형제의 허물을 차마 들추고 싶지 않은 자신의 감정과 선종 직전 그를 파면했다는 스승의 결정 가운데서 말입니다. 답답한 마음과 홀로 씨름하던 로렌스는 급기야 봉인을 깨뜨려 스승의 방문을 엽니다. 현재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보다 훨씬 무거운 십자가를 외로이 짊어졌을 스승을 떠올리며 단장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지 갈피를 못 잡고 목놓아 울던 그에게 응답하듯, 트랑블레의 부정 행위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비밀 문서가 눈 앞에 나타나는데요. 마치 외딴섬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기다리던 요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 때가 되면 다시 오겠노라는 희망의 메시지, 즉 일곱 인으로 봉인했던 묵시를 열어서 보여 주었던 것 처럼, 그에게도 봉인되었던 신의 뜻이 훤하게 계시되는 것만 같습니다. 로렌스는 결국 스승의 뜻을 받들어 비밀 문서를 형제들에게 공개합니다. 결연한 목소리로 모든 상황을 책임지고 단장직을 내려놓겠다는 그에게 현실적이고 사리에 밝은 인물인 벨리니가 묻습니다. 만일 교황이 된다면 어떤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냐고. 로렌스는 주저 없이 답합니다. 서양에서는 흔하디 흔한 이름이 바로 '존'이지만, 사모하는 스승이 받으셨던 성배를 자신도 외면할 수 없다면 한평생 예수를 따랐던 사도 요한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그 뒤를 따르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그의 눈빛에 스쳐갑니다.
또한 결과적으로는 성경 속 또 다른 '존'인 '세례 요한'을 연상시키는데요. 세례 요한은 예수의 사촌으로서 구약 성경의 예언에 따라 당시 유대교인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며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는 그리스도로 예수를 지목하고 증거하지만, 후에 그를 의심하여 제자들을 보내 진정 그리스도가 맞는지 재차 확인하려 듭니다. 이러한 모습이 로렌스의 행보와도 절묘하게 겹치는데요. 우여곡절 끝에 베니테즈를 차기 교황으로 선출하며 마침내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는 생각에 흡족해했으나, 그의 신체적 비밀을 알게 된 후 다시금 격렬한 의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같이 영화는 성경에 등장하는 도마, 사도 요한, 세례 요한, 이 세 인물을 로렌스에게 동시에 투영하여 그의 캐릭터를 한층 입체적이고 흥미롭게 빚어 냅니다.
전통이냐 정통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전통"과 "정통"의 대립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전통은 유전되어 오는 교회 내 관습 즉 문화를 일컫는 말이지만, 정통은 교회가 언제든 변치 않고 추구해야 할 가치 즉 본질을 의미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은 전통에 치우친 유대교의 현실을 꼬집었는데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두고 종교적 전통에 어긋난다며 꼬투리 잡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불순한 의도를 꿰뚫어 보고선,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일갈합니다. 그러면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에 빗대어 그들의 편협성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콘클라베>에서도 이처럼 전통과 정통이 팽팽하게 맞서는데요. 전통에 따라 로마 중심의 카톨릭을 재건하고 강력한 교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측과, 정통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며 평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는 진보 측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대립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권력에 대한 트랑블레의 탐욕이 밝혀져 아수라장이 된 시스티나 대성당에 마치 다들 정신 좀 차리라는 듯 요란한 폭발음이 들리며 천장의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는데요. 하필 로렌스의 마음에도 미세한 욕심의 부스러기가 묻어 투표 용지에 처음으로 자기자신의 이름을 적어 낸 그 순간에 말입니다. 이같은 폭탄 테러가 전통을 무시하고 타종교를 포용한 결과이기에 이제부터라도 종교 전쟁을 벌여야 한다며 격분하는 테데스코와 불경한 말로 신의 뜻을 모독하지 말라며 반격하는 벨리니의 과격한 언쟁을 끊고 그동안 잠잠히 선거에 임하던 베니테즈가 일어섭니다. 그는 신앙의 본질 즉 정통이란 무엇인지 조곤조곤 설파합니다. 싸워야 할 대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본성 즉 "증오"이며, 증오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카톨릭 정신이자 교회가 만들어 가야 할 미래라고 말입니다. ‘원수마저 사랑해야 한다’ 가르치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 군인들을 용서해달라 부르짖었던 예수의 형상이 그의 말에 오버랩됩니다. 모든 이의 양심을 일깨운 연설의 결과 베니테즈는 차기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깨진 유리창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 들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옵니다. 마지막 투표를 위해 용지에 이름을 적던 모두가 고개를 들어 그곳을 올려다봅니다. 성경에서는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이 바람처럼 움직이며 새가 내려앉듯 사람에게 임한다고 표현하는데요. 꽁꽁 문을 걸어 잠근 채 갈등과 반목이 가득했던 성당에 마침내 성령이 함께하고 신의 뜻에 합당한 대리인이 임명되었음을 암시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을 촉촉히 적시던 밥 딜런의 노래 "Blowing In The Wind"의 가사처럼 어쩌면 정답은 인간의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하는 바람 속에 흩날리고 있을지도요. 스며드는 바람을 느끼며 신의 뜻을 헤아린 듯 로렌스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번집니다.
영화는 반전을 통해 주제의식에 또 한 번 쐐기를 박는데요.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신께서 만드신 그대로'이기에 부끄러워 하지 않는 베니테즈의 모습에서 혹여 전통이라는 일반화된 사고의 틀에 우리 스스로를 끼워 맞추고 있지는 않나 돌아보게 됩니다. 집단 혹은 사회의 어떠한 잣대로 규정되거나 공인되는 우리 자신이 아닌, 신의 독창적인 창작품으로서 저마다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는 교훈을 안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정통성"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정통의 참된 의미를 이제서야 깨달은 로렌스의 오묘한 시선을 끝으로, 연못을 탈출한 거북이를 고이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로렌스의 손길이 그의 내일을 암시하며, 콘클라베의 여정은 막을 내리고 성당 문은 다시 열립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영화 <콘클라베>를 보며 한때 신앙인으로서 치열하게 살아 왔던 제 개인적인 삶을 의도치 않게 반추한 것 처럼, 영화는 종종 현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고로 영화보다 더 중요한 건 결국 살아 내야 할 현실입니다. <시네마 천국>에서 알프레도의 말처럼 현실은 영화보다 고통스러우니까요. 현재 저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두 시간 짜리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보는 것도 힘겨울 만큼 육체를 컨트롤할 수 없으며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채 몇 년째 고통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를 해도 신은 침묵할 뿐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또한 신의 뜻인지. 내 고통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는 건지. 애초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환상에 불과했는지... 다만, 내 생명을 당장 거두지 않는 것이 만약 신의 뜻이라면, 계속해서 육체를 짊어지고 견뎌 내야 하는 것이 내 숙명이라면 지금의 이 고통, 아니 내 평생의 고통, 심지어 신천지에 청춘을 잃고 흉터처럼 새겨진 회한마저 훗날 누군가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지는 귀중한 재료로 쓰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다 갈 수만 있다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속 연극 <바냐 아저씨>의 대사처럼 그 때 비로소 나라는 인간을 만들어 이 세상에 보냈던 신 앞에 서서 얘기할 수 있겠죠. "저 진짜 힘들었습니다..."
<콘클라베> 별점 / 한줄평
☆4.0
인간의 약하고 어두운 면을 예리하게 파고들어 가만히 끌어안는, 고밀도 고품격 종교 영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