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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엥?" 했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으며 하고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파악이 안돼서 난감했달까? 허나 두번, 세번 곱씹으며 관람할수록 미처 보지 못했던 프레임 너머 가장자리의 것들이 선연히 보이고, 마침내 관객의 마음 속에서 새롭게 재창조되어 꽃을 피우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이 영화 <애프터썬>이 그러합니다.

 

- 내용적으로는 성인이 된 딸이 유년 시절 아빠와의 여행을 회상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억, 즉 기억의 순간들과 기억 속에 존재하는 누군가를,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미지와 소리의 편집을 적극 활용하여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왕가위 감독 영화와 결이 비슷합니다. 우리가 보통 과거의 기억을 더듬을 때 구체적인 상황보다도 그 순간 흘러나오던 노래나 들리던 소리, 혹은 이미지와 촉감 같은 자극들이 더 또렷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러한 공감각적 요소들을 살려 기억의 불완전성을 잘 표현한 연출이 돋보입니다. 고로 전형적인 아빠와 딸의 이야기가 아닌 "기억"에 관한 짧은, 어쩌면 긴 필름입니다.

 

-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두 작품 모두 극중 소피가 말한대로 "내 마음에 녹화"하여 간직하고 있는 기억을 다루고 있으면서 서사적으로는 여백을 꽤나 남겨놓았습니다. 두 남녀가 만나 헤어지기까지 스냅 사진처럼 나열된 순간들 사이사이에 관객에게 드러내지 않은 둘만의 비밀(양조위가 앙코르와트 사원 기둥 벽에 묻어버린 그것)이 <화양연화>의 서사적 여백이라면, <애프터썬>은 캠코더에 담긴 아빠와의 여행 기록이 통로가 되어 소피의 기억과 소피의 기억 너머에 있는(어쩌면 성인이 되어서야 이제 보이는) 순간들까지 추억의 앨범처럼 차례로 보여주는 가운데 관객이 알 수 없는 여행 전후 부녀의 이야기가 서사적 여백으로 존재하죠. 따라서 이러한 서사적 여백을 더듬으며 따라가는 여정 속에서 인물들을 통하여 관객 각자의 기억과 기억 속의 누군가를 소환하고, 나아가 우리 각자의 영화로 치환되는 정서적 체험을 선사하는 놀라운 기능을 하는 영화가 바로 <애프터썬>입니다.

 

- 이 영화는 "이별 영화"입니다. 어쩌면 아빠를 상실하기 전 까지 소피에게 캠코더 속 여행은 다른 의미로만 기억되었을지 모릅니다. 이번에 볼때 느낀 점은 소피에게는 사랑하는 아빠와 보낸 즐거운 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정체성이 형성된 시발점으로서의 의미가 큰 여행일 수 있었겠다는 점입니다. 여러 신에서 꽤나 디테일하게 이러한 부분을 묘사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아빠를 잃은 후에 소피는 그때 그 여행이 아빠와의 "이별 여행"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꿀 떨어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웃음 짓고 쓰다듬는 얼굴 뒤에 가려져 있던 아빠의 다른 모습들도 기억 너머에 존재했음을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때는 차마 알아주지 못하고 감싸안아주지 못했던 아빠의 잔상을 치열하게 붙잡고 어루만집니다. '난 이제서야 아빠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와 외로움과 고통이 보이는데 왜 내 기억 속에만 살아계신거에요? 그 여름 아빠가 나와 함께 해줘서 참 행복했어요. 미처 말 못했지만 사랑해요...' 이렇게 아빠에게 보내는 뒤늦은 이별 편지와도 같은 영화가 <애프터썬>입니다.

 

- 반면 아빠는 소피와의 여행이 "이별 여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소피의 기억 너머에 존재하는 아빠의 모습을 상당히 스산하면서도 쓸쓸한 이미지로 그립니다. 마치 죽음의 그림자 같은 알 수 없는 어둠이 아빠를 덮고 있는듯 보입니다. 극중에서 아빠가 경제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이고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그로인해 이 여행은 아빠에겐 처음부터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과의 마지막 여행이었을거라 보여집니다. 특히 엔딩의 공항신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딸의 모습을 끝까지 캠코더로 남기고, 아마도 기록된 영상의 마지막 장면이었을 해맑은 소피의 얼굴이 성인이 된 소피의 얼굴과 오버랩될 때, 제 인생에서 가장 슬픈 영화로 꼽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엔딩이 연상되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초원 사진관 앞에 걸려있던 자신의 증명사진을 보고 해사하게 미소짓던 심은하의 모습. 그리고 이어지던 한석규의 나레이션. '제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 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소피를 보낸후 캠코더를 끄고 뒤돌아서 문을 나가던, 어둠 속 인파를 향해 사라지던 아빠의 뒷모습에서(아빠가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겼음을 의미한다고 봄) 소피를 향한 아빠의 속삭임이 들리는듯 했습니다. '너를 간직한채 떠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보여주진 않지만, 그 어떤 멜로 영화보다도 슬픈 이별 영화가 <애프터썬>입니다.

 

- 저는 자녀가 없고 미혼이기 때문에, 또한 부모님을 잃은 경험은 아직 없기에 이번에 관람할 때는 헤어진 전애인과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소피처럼 그때는 차마 몰랐죠. 그게 마지막이었을 줄은...

 

- Queen의 <Under pressure>가 이 영화의 주제가나 다름 없는 듯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형태의 고통을 배우고 짊어집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필요한건 어쩌면 타인에게 받는 사랑과 타인에게 주는 사랑이겠죠. 20년전 아빠를 지탱했던건 딸에 대한 사랑, 그리고 현재의 소피를 지탱하고 있는 것 또한 아기에 대한 사랑이라 보여지기에 이 노래는 감독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유일한 영화적 장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 이 영화를 처음 관람했을 때는 서두에 말한 이유 때문에 별점을 보류했고, 2회차 관람 후에는 별 네개 반을 주었었는데, 최종적으로 별 다섯개 만점입니다. 지난 번에 쓴 글에서 언급한 '영화가 끝난후 비로소 시작되는 영화'를 넘어 '볼수록 다시금 새롭게 시작되는 영화'가 바로 <애프터썬>입니다.

 

별점 & 한두줄평 

●●●●● 소멸되기에 아련한 존재, 불완전하기에 찬란한 기억.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도 그 어떤 영화보다 애절한 이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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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 #후기 #리뷰 #별점


발없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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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파워핑크걸 2023.03.06 07:28
    저도 처음엔 엥? 하고 불호로 영화관람을 마치고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예고편을 봤을땐 단순히 어린소녀가 아버지와 휴가지에서 보냈었던 즐거운 기억을 회상하는줄로만 알았었거든요. 근데 이 영화는 그렇지않았고 더 깊고 그늘진 인간내면의 어두움과 우울감을 비춰주고있더라구요. 휴먼가족사랑 드라마를 기대하고간 제게 보일리없었었죠. 무코후기들을 보고 영화내용을 곱씹게됐는데 엔딩부 퀸노래가 그렇게 슬프게들릴수가없더라구요.안보이던게 보이면서 한동안 계속생각나서 마음이 너무아팠었어요.
  • @파워핑크걸님에게 보내는 답글
    발없는새 2023.03.06 07:43
    저도 포스터나 홍보만 봤을때는 작년 오스카 작품상 수상작 <코다> 정도를 기대했었는데 웬걸? 보면 볼수록 개인적으로 지난해 최고작 <드라이브 마이 카>급이네요ㅎㅎ
  • 스턴트맨마이크 2023.03.06 07:28
    아침부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스턴트맨마이크님에게 보내는 답글
    발없는새 2023.03.06 07:44
    아침부터 읽기엔 다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ㅎㅎ
  • @발없는새님에게 보내는 답글
    스턴트맨마이크 2023.03.06 08:44
    무코님 글 읽고 저도 안썼던 영화 관람 글 정리했네요. 감사합니다.
  • @스턴트맨마이크님에게 보내는 답글
    발없는새 2023.03.06 08:47
    ㅎㅎ 좋은쪽이든 안좋은쪽이든 글을 쓸수 밖에 없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는거 같아요
  • 플러스알파 2023.03.06 09:40
    under pressure가 이렇게 슬픈 노래인 줄 미처 몰랐죠.. 이동진 평론가 말로는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노래는 성인 소피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노래라서 영화의 모든 순간에 어울릴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구요
  • @플러스알파님에게 보내는 답글
    발없는새 2023.03.06 09:51
    그쵸ㅎㅎ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더듬을때 구체적인 상황보다도 그때 흘러나오던 노래나 들리던 소리, 혹은 이미지와 촉감 같은 자극들이 먼저 또렷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공감각적 요소들을 살려 기억의 불완전성을 잘 표현한 연출이 돋보였어요
    (덕분에 글쓰면서 빼먹었던 부분이 생각나서 본문에 추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ㅎㅎ)
  • XFJin08 2023.03.06 11:04
    첫 관람 땐 한숨 푹푹이었는데.. 두번째 보니까 굉장하더라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ㅎㅎ
  • @XFJin08님에게 보내는 답글
    발없는새 2023.03.06 11:26
    N차 관람이 필수인 영화죠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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