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연세에도 대표 비주얼리스트로 꼽히는 리들리 스콧의 명성답게, 영상미는 확실히 압도적이었습니다.
몇가지 장대한 스펙터클만 금방 떠올려봐도 아우스터리츠 전투, 대관식, 모스크바 입성, 워털루 전투 등... 이외에도 궁중 장면들의 화려한 미술, 세트도 돋보였죠.
개인적으로 화면이 좀 어둡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눈이 즐거운 영화였던 것만은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실 듯 합니다.
하지만 의아할 정도로 뚝뚝 끊기는 흐름 탓에 몰입하기가 참 힘든 관람이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해서 1815년 워털루와 유배까지 나폴레옹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몹시 빠른 페이스로 훑습니다. 흐름이 일목요연하다기보다 많은 사건들을 주마간산 식으로 설렁설렁... 무미건조하게 넘겨버려요.
그나마 중심으로 잡고 있는 이야기는 나폴레옹과 그의 유명한 애인 조제핀의 관계인데, 여기서 영화가 탄력을 받았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두 인물의 서사와 감정선에서는 이렇다 할 깊이도, 흥미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네사 커비의 빼어난 미모와 연기력만 남을 뿐이죠. 심지어는 이 둘의 관계마저도 나폴레옹의 추하고 찌질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데 이용되어 납작해진 것 같아요.
영화는 나폴레옹이란 인물을 노골적으로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 같은 배우의 최근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떠올랐습니다. 어쩌다 18세기 프랑스 육군에 떨어진 '보'의 흥망성쇠기랄까 ㅋㅋ
물론 실제 나폴레옹은 대단한 야심가이자 사상가, 전쟁사에 길이 남을 천재였지만, 그런 면모를 제거하고 우스운 찌질이로 그리는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은 아닙니다. 나폴레옹이 현대 관점에선 충분히 호오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걸 나폴레옹을 작정하고 풍자하고 깎아내리는 블랙코미디로 보기에도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첫째로 영화 속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주요 전투 장면은 할리우드 전쟁물의 관습에 따라 호쾌하고 위풍당당하게 연출되어서, 나폴레옹을 맥없고 찌질하게 비추는 다른 장면들과 톤이 충돌합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이란 주인공은 관객들이 어떤 감정이든 이입할 만한 생동감이 없습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보'는 몹시 소심하고 답답한 캐릭터였지만 그 내면과 서사를 충분히 다뤄준 덕에 깊이 와닿는 인물이 됐습니다.
나폴레옹은 매우 긴 러닝타임에서 많은 분량을 확보하고도, 그의 내면과 선택들이 딱히 연결성이나 설득력도 없이 단순히 역사에 맞춰 인물을 끼워맞춘 듯 무미건조하게 느껴집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나폴레옹>은 성의없이 축약한 나폴레옹의 일대기,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관계를 그린 기괴한 로맨스(?), 그리고 전쟁물로서의 전형적인 스펙터클을 누더기 같은 편집으로 혼란스럽게 이어붙인 어수선한 영화라는 게 제 총평입니다.
기대치를 잔뜩 높여준 예고편만 보고 영화를 봐서인지, 실망스러운 구석이 너무 많았던 영화였네요.
리들리 스콧이 한번 더 감독판으로 평가를 돌려놓을 수 있을지 궁금한데... 개인적으로 감독판을 챙겨보고 싶을 만큼의 매력도 느끼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