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 평론가의 영화 <곡성> 평론
마침내 영화를 보았다.
보고 나자 무언가 보긴 보았는데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를 모르겠다고 모두들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군가는 거만하게 이 복잡한 이야기에는 심오한 비밀이 담겨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반대로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소문대로) 시골 마을에 연속적으로 정체불명의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현장을 수색하던 동네 경찰 종구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한 일본인의 오두막에서 어린 딸의 신발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날부터 딸은 신열을 앓기 시작한다.
무당이 등장하고 점입가경으로 동네 사람들은 하나둘 좀비가 되어가고, 여기에 엑소시즘을 하기 위해 신부님까지 가세한다.
좀 더 놀라운 건 처녀 귀신도 깊은 밤에 동네를 나돌아 다닌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딸을 구하기 위해서 악전고투를 시작한다.
간단하게 말하겠다.
나홍진은 한 영화 안에 있어서는 안 될 서로 다른 것들을 뒤죽박죽으로 섞었다
장르는 규칙의 게임이다.
그런데 <곡성>은 공포 영화 안에서 서로 다른 게임을 거의 폭력적인 수준으로 뒤섞기 시작한다.
좀비는 살아난 시체이고 귀신은 누군가의 눈에만 나타나는 허깨비이다.
물론 둘 다 영화적 상상력의 창조물이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의 경계를 넘어서면 안 된다.
왜냐하면 좀비는 과학이 실패한 생명의 영역이고, 귀신은 종교가 자신을 의심할 때 나타나는 영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실험적인 스토리텔링이라고 감탄할 것이고, 반대로 누군가는 반칙이라고 화를 낼 것이다.
문제는 실험이라기에는 이야기가 앞뒤가 안 맞는 정도를 넘어서 거의 부조리하게 느껴질 정도이고, 그렇다고 반칙이라고 하기에는 거의 모든 장면에 몹시 공을 들여 안정된 톤을 유지하면서 그 긴 시간 동안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아마 다짜고짜 대답을 요구하고 싶을 것이다.
무서운가요?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종종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을 준비도 함께해야 한다.
<곡성>에서 가장 무서운 건 나홍진의 연출 솜씨가 아니라 미술부가 붉은 페인트로 뒤범벅을 한 시골집 폐허의 오싹한 방 안 풍경들이다.
몹시 ‘찝찝한’ 상태로 극장을 떠난 당신이 카페에서 열띤 토론을 할지 짜증을 내면서 집에 갈지는 누구와 영화를 보러 갔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이 영화(곡성)를 경멸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한 가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미끼인 줄 알면서도 그걸 무는 대중의 자발성이다.
그들은 끝내 확인되지 않는 의미를 덥썩 문 다음 자기 자신을 위한 알리바이를 무한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어떤 주장은 너무 기발해서 나홍진도 감탄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들도 물론 자신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알라바이가 영화와 아무 상관도 없는 거짓말이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핵심은 거짓된 충성을 공유하면서 효과적으로 자신들을 단단하게 결속시켜나가는 과정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일 거기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면 이 신비로운 결속은 깨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이한 알라바이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집단적으로 수행한 것일까.
대답은 단순하지만 설명하기는 까다롭다.
그들은 스스로 잘못된 목적지에 이르기를 원한다.
본인만의 해석틀이 치밀한 나머지, 자신만의 영화공식을 만들어서 거기에 대입하듯 영화를 리뷰하다보니, 완고하고 고지식하달까요. 그 덕에 한 영화를 헤집듯 철저히 분석하는건 경이로우나 그 역시 전부 전달하지도 못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