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전작 <드라이브마이카>에서 세 시간 동안의 긴 서사를 통해 인간 내면을 탐구하며, 상실감으로 가득한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신작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관람했습니다.
이번 영화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술관에서 추상화를 감상하는 듯합니다. 뜬금없기도 하고 공백이 너무 많은 결말 때문입니다. 평론가들은 호평 일색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언뜻 알아채기 어려워 각 장면과 캐릭터를 되짚어보게 합니다. 저는 열린 결말을 부정하거나 싫어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출가는 관객이 최소한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즉시, 아니면 조금만 생각해 보고 알아채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생충>을 보고 나서 이게 무슨 주제야라고 묻지 않듯이 말이지요. 특정 장면이나 클리셰, 사물 등이 나타내는 감추어 놓은 의미를 확인하는 재미는 논외로 하고 말입니다.
이 영화의 결말은 마치 어떤 목적을 갖고 열심을 다해 탑을 쌓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발적으로 한순간에 탑을 싹 무너뜨리는 듯합니다. 감독이 말합니다. "자, 이 정도면 대충 알겠지? 궁금하면 한 번 더 봐, 그럼 알 수도..." (한 번 더 봐, 이 말은 감독 인터뷰에서 따온 말입니다. ^^; )
지나치게, 굳이, 왜? 아무튼 불친절합니다.
영화는 나무, 산, 꿩의 깃털, 사슴, 타쿠미, 하나, 타카하시를 통해 묻고 답하며 또 묻습니다.
자연과 동물은 악을 행하는가? 인간은 악을 행하는가?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는가, 아니면 착취하는가?
자연과 동물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 우리(인간)는 이성을 갖고 자연과 동물에게 악을 행하긴 하지만 각자의 사정을 따져보면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우발적으로 행동하면 그건 악한 건가? 아닌 건가?
그러면서 자연에서 발생하는 우연과 동물의 본성, 인간이 저지르는 우발과 이성의 한계를 대비하면서도 동일시합니다.
영화는 타쿠미와 하나를 둘러싼 일상의 패턴을 무미건조한척하지만 정성껏 보여줍니다. 그러다 보조금을 노리고 글램핑장을 조성하려는 연예 기획사가 등장하면서 긴장이 조성됩니다. 그리고 자연과 동물은 '우연'하게, 인간은 각자의 사정으로 '우발'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글램핑장 컨설턴트: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타쿠미에게 글램핌장 관리인을 맡기면 어떻냐고 묻습니다.
연예 기획사 사장: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보조금이 필요합니다.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일단 땅을 샀습니다. 당장 다시 마을로 가서 타쿠미를 설득하라고 합니다.
타카하시: 마을로 돌아오다 난데없이 본인이 글램핑장 관리인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보이는 연배는 결혼해서 아이들도 있을 나이 같은데 다행히 미혼입니다. 자기 혼자 결정하면 뭐든 될 것 같긴 합니다.) 갑자기 나무를 패고, 마을에 며칠 더 머물 생각을 합니다. 하나를 찾아 나선 타쿠미를 뒤늦게 따라나섭니다.
사슴: 총알을 맞은 사슴 앞에 하나가 서 있습니다. 타쿠미가 언급한 대로라면 사슴의 어미는 하나를 범인으로 의심했을 것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했을 겁니다.
타쿠미: 봉변을 당한 듯한 하나 앞에 타카하시가 있습니다. 글램핑장 계획이 없었더라면, 타카하시가 오늘 오지 않았더라면... 삶의 터전인 자연을 잃거나 훼손하는 것도 싫은데 아내에 이어 하나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사슴 어미와 같이 행동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자연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이 부조리극을 통해 감독이 상대주의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를 환영하겠지만, 관람 후 찾아본 인터뷰를 읽어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듯합니다.
절대 악(惡)이 없으니, 선(善)도 희미해집니다. 본성이나 의지에 따른 결과가 있음에도 그걸 우연이나 우발로 치부해버립니다. 관객은 아무런 판단도 심판도 구원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바라보고 생각만 해야 할 뿐입니다. 그래서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다음 영화가 나온다면 찾아보긴 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