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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적 순환론 속에서 어떨 때 혼자하거나 함께해야 윤리적으로나 실존적으로 올바르게 공생할 것인가에 대해 사실상 양가적인 부분들을 한몸으로 보면서 대답한다. 혼자와 함께도 모두 악이 되거나 동시에 선이 되며, 과거와 현재가 맞닿고 순환하는 시간선의 반복도 인간과 유인원 각자의 입장에서 마찬가지로 선악과이며, 유인원과 인간이 같거나 다르거나 같아지려하거나 달라지려는 부분들까지도 그렇다. 이기심과 이타심(공생)은 서로에게 필요조건이며, 사실상 한 몸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그 속에서 개인의 행동이 집단이나 법을 거스르려는것 또한 선이거나 필요악일 수 있다. 또는 함께라는 이름의 폭력과 가스라이팅 속에 은연중 잠식되있을 꽤 많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도 만든다.
그래서 메이가 가진 딜레마와 그 결단은 사실상 노아와 대립되는 부분이 크지만, 그자체로 같은 대의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며 프록시무스의 이기심과 의심같은 것이 오히려 개인적 성향으로는 메이와 같다. 즉, 메이는 그 중간지대에서 양자간의 딜레마와 실존을 흡수해낸 캐릭터다. 그래서 유인원으로써는 시저를 이어받는 듯한 성장영화 서사속 영웅이 될 노아가 옳을까, 결과적으로 프록시무스가 옳을까에 대한 대답은 인간에게도 고스란히 유효한 질문이며, 그 답은 아직도 실존적, 정치적으로는 결코 쉽지 않다. 윤리만이 삶의 모든 것은 아닐 때도 많으니.
역대 혹성탈출의 테마들을 직간접적으로 모두 다루면서도 새로운 서문을 여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시각효과와 다채로운 넓이를 지닌 플롯이 훌륭하고,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딜레마와 넌센스를 다루는 부분이 가장 놀랍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프록시무스도, 메이도, 노아도 아니라 죽은 박사와 유인원 무리, 독수리 무리들처럼 현 체제나 군중의식에 그냥 문제의식을 가지고도 순응하는 혼자서는 약자라는 사실이 매우 서늘하고도 잔인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과연 집단의식 없이 홀로 좋은 사람이라 떳떳이 말할 수 있을까.
프록시무스의 최후 역시, 군중의식을 위시한 독재자의 최후라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물타기처럼 숨어있다가 이행되는 시저,프록시무스,메이,노아 등 처럼은 (대부분 혼자서는) 못할 군중의식자체는 찝찝하다.
그 외에도 오랑우탄은 아버지이자 시저로 상징되고 성장영화이면서 굴레를 깨닫는 반성장극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혼자서 하는것이 없다는 비판이 많은데, 시저같은 타고난 이름의 리더십있는 장군과 달리 노아는 지형지물이나 자연을 이용해 해방을 꿰낸 인물이다. 조금 더 타고나기보다 우연을 통해 일반적 사람이 리더가 되는 첫 계기를 그려낸 (반)성장극에 가깝기에 혼자서 빌런을 격투로 해치운 시저와는 성격자체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왕정국가의 리더가 아닌 민주주의의 리더같은 느낌에서 프록시무스와 다르고 시저와도 적극성의 측면에서, 의심의 측면서도 다른 듯 보인다. 노아와 메이의 (반)성장극으로 보아 흥미롭고 특히 메이는 이미 삶의 경험들로 어린 나이에도 다 꿰뚫어 보는 비관적 예지자같은 느낌으로 노아에게 깨달음을 선사하는 자이기도 하며 그자체로 개인적으론 성장하기 힘든 반성장극의 주인공으로 보인다.
4.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