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ko.kr/12448202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첨부


이 영화는 정말 해석이 분분하더군요.

결말부가 워낙 모호하고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해서 그런 거 같습니다.

여러 해석들을 보면서 기발하다고 생각한 것도 있고 엉뚱하다고 생각한 것도 있는데

저는 좀 다른 결로 가려고요.

 

이렇게 해석이 어려운 작품을 만났을 때 저만의 해결 방식이 있는데

그건 작품의 해석을 하나 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맞짱뜨는 방식이라고 해야겠네요.

 

우선 자이가르닉 효과에 대해서 좀 설명해 볼게요.

자이가르닉 효과란 “풀리지 않은 숙제는 오래 머릿속에 남는다”는 이론인데요.

예컨대 수없이 많은 테이블에 음식을 날라야 하는 서빙이 테이블에 음식을 나르고는 곧바로

무얼 서빙했는지 잊어버린다는 데서 착안한 이론입니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는 서빙들이 엄청나게 복잡한 주문을 기가 막히게 외워서 서빙하곤

했다는데 그 많은 양을 외워서 서빙하고는 곧바로 잊어버렸대요. 해결한 문제는 곧바로

머릿속에서 삭제 되는 것이죠.

반면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게 된다는 얘긴데

심리학에서 말하는 ‘트라우마’ 현상 같은 것도 자이가르닉 효과에 해당합니다.

 

 

images.png.jpg

 

이론적인 얘기는 그만두고요.

실례를 들자면 우리나라 이상 시인의 ‘오감도’는 그 난해함으로

많은 식자들의 도전을 받고 또 무수한 해석과 논문을 생산케하는 괴작이자 걸작인데요.

참고로 제가 알고 있는 재밌는 해석 중에는 고 마광수 교수의 것이 있는데

오감도 속의 13 아해가 남자의 정자이고,

아해들이 질주하는 것이 정자들이 헤엄쳐 돌진하는 거래요.

엉뚱하기 짝이 없는데 작품이 하도 괴랄하다 보니 이런 묘한 해석도 있더군요.

 

또 하나 더 들자면 그 유명한 정현종 시인의 ‘섬’이 있는데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 시는 아주 짧으면서도 모호하기 짝이 없어 늘 사람들이 애송하면서도

그 의미를 궁금해 하는 명시이지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단 게 무슨 뜻일까요?

 

또 그 섬에 가고 싶단 건 무슨 뜻일까요?

 

이 두 작품 ‘오감도’와 ‘섬’에는 전술했다시피 엄청난 양의 해석과

논란이 생산되고 있는데,

 

이 두 작품을 이렇게 해석한 사람이 있어요.

두 작품은 “모호하기 위해서 모호한 작품이다”

 

좀 악랄하게 말하면 작가가 독자를 엿멕이기 위해서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일부러

해석 불가능한 외계어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인데요.

 

 

NISI20240326_0001511088_web.jpg

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한번 봐볼까 해요.

 

이 작품은 초중반부까지는 해석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친절하게 흘러가죠.

문제는 타쿠미의 딸이 실종되면서 부터 시작되는데

 

가장 논쟁적인 부분인 왜, 어째서 타쿠미가 기획사 직원 다카하시의 목을 졸랐느냐가

되겠는데

사실 그 상황을 정리해보면 이와 같습니다.

 

실종된 하나가 총에 맞은 사슴과 조우하고 있는 상황에

타쿠미와 다카하시가 이 광경을 먼 발치에서 발견했고

놀란 다카하시가 성급하게 현장에 다가서려는데

이를 타쿠미가 제지하고는 급기야 넘어뜨리고 갑자기 목을 조른다는 건데,

 

여기서 하나와 사슴의 상황은 전혀 안전하지 않다고 봐야하죠.

타쿠미가 말했듯이 총에 빗맞은 사슴은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고,

하나는 모자까지 벗어들고 사슴에 접근하는 상태였으니,

어찌보면 아주 긴박한 상황인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뿐인 딸 하나를 구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였을 텐데

타쿠미는 오히려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자신도 아니고, 딸도 아니고 다카하시도 아니고

사슴을 먼저 챙기는 듯한 행동을 취했으니까요.

 

왜일까요?

본능에 너무나 역행하는 행동이죠. 그 상황에서는 딸을 가장 먼저 구하는 게 지상과제였을

텐데.

 

그리고 다카하시가 죽은 게 맞은 걸까요?

일단 목이 졸리고 게거품을 물고 눈이 뒤집어졌으니 죽었다고 보는 게 맥락에 맞겠지만

나중에 다시 일어나서 몇 발자국 걷다가 쓰러졌으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고 보는 게

맞을 듯 하고.

 

그리고 딸 하나는 죽은 게 맞을까요?

쓰러진 하나가 숨을 쉬는지 확인한 타쿠미는 하나를 일으켜 세워 안고 가는데

그 과정이 너무 태연합니다.

저는 그래서 살았다고 생각하고요.

 

각설하고

 

저는 이 영화가 거장 감독이 관객에게 갑질을 했다고 주장하려고요.

즉 물흐르듯 흘러가던 영화가 돌연 괴랄해지면서 관객에게 일종의 텃세를 부린 건데,

애초부터 거기에 정답은 없단 것이죠.

 

이를테면 ‘오감도’나 ‘섬’이 모호함을 위한 모호함을 택한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건데

 

이 작품 역시 모호함을 위한 모호함을 택했다고 보고

 

그 결과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고 돌아가서 며칠 간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뭔지

씨름하게  되겠죠.

 

자이가르닉 효과에서처럼 풀리지 않은 숙제는 기억에 남는 법이니 이 영화는 오래도록

관객의 머릿속에 남을 것이고 그걸로 감독의 갑질은 성공하는 것이 되겠죠.

 

사실 타쿠미의 행동은 너무나 상식 밖이고 돌발적입니다.

그렇게 상식 밖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타쿠미가 사이코패스였을까요?

그러나 영화 초중반부의 그는 너무나 합리적입니다. 사실 마을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

쩜쩌먹게 합리적이죠. 기획사 직원들의 말문을 막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다른 해석들을 보면서 상당히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고 설득당한 해석도

있었는데요.

그 해석보다 제 해석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제 해석은 해석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찌보면 해석의 거부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쨌든 이런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는 쯤에서 마무리할까 합니다.

 

그럼 다음 리뷰에서 다시 만나요.


profile 놀붕

영화영화영화

이전 다음 위로 아래로 스크랩 (2)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첨부
  • Cinephilia 2024.10.08 06:11
    그래서 해석은 없네요
  • @Cinephilia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놀붕 2024.10.08 10:34
    본문에 그렇게 썼어요. 제 해석은 해석이라 할 수 없고 해석의 거부라고... 읽으신 거죠?
  • profile
    파워핑크걸 2024.10.08 07:01
    자이가르닉 효과라는걸 배웠네용
  • @파워핑크걸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놀붕 2024.10.08 10:35
    감사합니다 ^^
  • 김마요 2024.10.08 16:06
    재미있는 글이네요. 술술 읽혀서 즐겁게 봤습니다.
  • @김마요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놀붕 2024.10.08 19:30
    감사해요.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 profile
    Nashira 2024.10.09 19:45

    오옷~ 이 영화를 보고 시인/건축가 이상을 떠올리시다닛~! :)
    저는 <악존않>을 마치 자연/재난재해 느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하다' 란 뜻인 만큼,  

    어떠한 의도적인 행위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우주만물의 존재나 상태란 게 떠올랐거든요.
    개인적으로 이상의 오감도 시리즈는 이해하기 어려운 자연/시공간과 인간세상의 원리를 물리학적 원리에 따라 표현했다는 해석을 받아들이는 1인인데요. 
    영화 속 눈밭 호수에 비친 풍경처럼 거울(작용/반작용)스러운 행렬식으로 표기한 오감도 제4호를 (뭔진 몰라도) 가장 좋아합니다. :)

  • @Nashira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놀붕 2024.10.10 11:05
    오 마지막 세줄이 인상적입니다.

칼럼 연재를 원하시면 <문의게시판>을 통해 문의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제목 글쓴이 날짜
파트너 계정 신청방법 및 가이드 file admin 2022.12.22 676025
[CGV,MEGABOX,LOTTE CINEMA 정리] [52] file Bob 2022.09.18 782623
💥💥무코 꿀기능 총정리💥💥 [108] file admin 2022.08.18 1111226
무코 활동을 하면서 알아두면 좋은 용어들 & 팁들 [70] admin 2022.08.17 817667
게시판 최종 안내 v 1.5 [66] admin 2022.08.16 1493724
(필독) 무코 통합 이용규칙 v 1.9 admin 2022.08.15 587556
더보기
(약스포)프로이트 라스트세션 기대보다는!! 피터빠커 2024.08.26 424
오펜하이머 돌비로 오십시오ㅋㅋ [42] file 내꼬답 2023.08.15 2026
U+tv 모아 10일이상 출석하면 커피가?! file 엘지유플러스 파트너 2024.10.02 125711
<탑건: 매버릭> 리뷰 - 부제는 왜 '매버릭'인가 (스포일러) [18] file
image
2022.08.17 5221
<놉> 리뷰 - DOPE! (강스포일러) [38] file
image
2022.08.17 5243
<헌트> 리뷰 - 내부의 적에 대한 균형 잡힌 통찰 (스포일러) [17] file
image
2022.08.18 4818
<퍼스트맨> - 만남이란 무엇인가 [12] file
image
2022.08.19 4644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리뷰 - 단 하나의 마블 시네마 (스포일러) [15] file
image
2022.08.19 5043
<화이트 타이거>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14] file
image
2022.08.20 4644
<풀타임> 리뷰 - 엄마의 인생이라는 파도 (스포일러) [22] file
image
2022.08.20 5063
<바후발리> - 카르마란 무엇인가 [15] file
image
2022.08.20 4850
<큐어 Cure> 칼을 들고 치료하라 [12] file
image
2022.08.21 4865
<카터> 190억짜리 액션 포트폴리오 [13] file
image
2022.08.21 5210
<12인의 성난 사람들> 리뷰 - 밀실 속 민주주의의 명암 (스포일러) [11] file
image
2022.08.21 4688
<사부:영춘권 마스터> 쿵푸란 무엇인가 [9] file
image
2022.08.21 4479
[놉] 리뷰: 주체성 회복에 대한 시선 (스포) [11] file
image
2022.08.21 4678
<쇼생크 탈출> 희망이란 무엇인가 [14] file
image
2022.08.22 4891
<비상선언> 리뷰 - 그 비행기는 어디로 가려던 걸까 (스포일러) [8] file
image
2022.08.22 4973
<막달라 마리아> 역사 속의 여성이란 무엇인가 [9] file
image
2022.08.22 4688
< RRR > 인도여 하나가 되어라, 반데 마타람! [6] file
image
2022.08.23 4730
<돈 룩 업> - 종말이란 무엇인가 [19] file
image
2022.08.23 4589
<토르:러브 앤 썬더> 바이킹과 붓다, 그리고 Rock [8] file
image
2022.08.24 4808
<엘비스> 심장을 내어주고 사랑을 가져간 남자 [8] file
image
2022.08.24 4637
이전 1 2 3 4 5 6 7 8 9 10 다음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