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알렉스 가랜드의 <시빌 워>를 방금 봤습니다. 정식 개봉은 북미와 똑같이 12일이지만 런던 BFI 아이맥스관에서 이틀 정도 일찍 프리뷰 상영을 해서 보고 왔어요.
<시빌 워>의 화면비가 1.85:1이기도 하고, 다 보고 나니 장면들이나 사운드도 좋아서 확실히 아이맥스에 잘 맞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빌 워>는 한마디로 종군 사진기자들에 관한 아주 생생한 밀착다큐같은 영화입니다. 내전으로 무법지대가 된 사실상 오늘날의 미국에서, 마치 <파묘>처럼 4인조로 된 주인공들이 극 중 신내전의 불씨를 당긴 장본인인 미 대통령에게 인터뷰를 시도할 담대한 목적으로 뉴욕에서 워싱턴 D.C.까지 차를 타고 이동하며 겪는 일화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단 <시빌 워>의 배경인 내전의 구체적인 원인이나 형세, 결과는 영화에서 전혀 중요치 않고, 지나가는 대사 한 마디로만 가끔 언급될 정도로 매우 부차적입니다. 워싱턴 D.C. 전투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떤 '세력'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묘사되지 않아요. 그보다 이 작품의 핵심은 주인공들이 무법지대로 변해버린 미 동부 도로와 워싱턴에서 목격하는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현장들, 그리고 그 현장들을 렌즈에 담아내는 주인공 기자들의 자세입니다.
현실에서 전쟁이나 테러가 있을 때, 현장에서 보내는 사진들 중 언론사에서 필터링되고 대신 구글링하면 나오는 그런 잔혹한 실제 현장의 모습들이 영화에서 (고어하진 않지만) 상당히 직접적으로, 빈번하게 묘사됩니다. <시카리오>에도 그런 장면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시빌 워>의 그래픽한 장면들이 좀 더 참혹해보이고 세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여러 상황에서 사람이 총에 맞는 순간들도 가감없이 그대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어떤 위험이 있어도, 설사 동료가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현장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서 사건을 카메라에 담는 일이 가장 최우선인 사진기자의 저널리즘이 비중있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훌륭한' 전장 사진이란 어떤 것인가, '훌륭한' 종군 사진기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도 담겨있고요. 다만 이들의 직업의식이 숭고하게 묘사되지는 않고, 그것의 양면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는게 흥미롭습니다.
영화의 분위기는 초반부 주인공들 서사의 약간의 루즈함을 제외하면 역시 <시카리오>처럼 대체적으로 긴장감이 깔려있는데, 일단 주인공 일행이 이동을 시작하고 나면 '어디서 갑자기 총알이 튀어 날아올지 모르는' 긴장이 계속됩니다. 특히 예고편에도 나왔던 '빨간' 안경을 쓴 군인이 "너는 어떤 미국인인데?"라고 심문하는 장면 전체의 서스펜스가 정말 잔인할 정도로 리얼한데, 실제 극 중에서도 이 시퀀스에서 주인공들의 멘탈이 박살나고, 여기서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뉩니다.
특히 쿠데타 전투가 벌어지는 워싱턴에서 펼쳐지는 후반부는 영화가 그야말로 거의 총소리로 가득 차 있어요. 화면에 펼쳐지는 액션들에 집중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면서 보고 있었는데, 뭔가 이런 류의 장르, 게임, 시나리오에서 사람들이 언젠가 실사로 보고싶었던 그런 장면들을 좀 묘사한 느낌이었습니다. 음악 하나 없이 클라이맥스에서 쭉 이어지는 총격전은 개인적으로 <시카리오>의 후반부 땅굴 총격씬보다 좀 더 압도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시카리오>와 비교할 때 <시빌 워>에서 조금 독특하다고 생각된게 음악이었는데, 비슷한 류인 <시카리오>가 요한 요한슨의 둥둥 거리는 OST로 내내 분위기를 조성했다면 <시빌 워>의 사운드는 '스코어'란게 거의 없었습니다. 그 대신 여러 노래들이 중간중간 자주 삽입되어 있고, 그 외에는 실감나는 총소리말고는 따로 특별한 스코어가 없는 수준입니다. 나름 흥겨운 분위기의 노래들이 중간에 나오는데도 영화가 여전히 드라이하고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흐른다는 건, 그만큼 화면 속 장면들이 주는 몰입감이 좋다는 거겠죠.
게다가 인상적인 것은 극 중에서 벌어지는 사건과는 별개로, 주인공들이 이동하며 지나치는 미국의 자연풍경들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잡는다는 점입니다. 풍성한 푸른 숲, 호수에 반사되는 아른거리는 햇빛들, 나뭇잎들, 꽃들, 산불 등의 장면들이 선사하는 시각적 아름다움이, 극 중에 묘사되는 참혹하게 널부러지거나 쌓인 시체들, 폭격에 맞은 건물 등과 대비가 되더군요. 넓은 자연의 땅인 미국에서 모든 이들이 총을 들고 서로 싸우는 무법지대가 펼쳐진다면, 무슨 디스토피아처럼 황폐화된 그런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이런 느낌, 평화 속에 도사리는 공포이겠구나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요소는 여성 주인공 두 명, 저명한 베테랑 여기자(커스틴 던스트)와 신참 여기자(케일리 스패니) 간의 관계입니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주인공이 열정적이지만 겁이 많은 후배 신참을 처음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선배로써 아끼려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되고 변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보면 영화가 한결 재미있게 느껴지지라 생각됩니다. 제가 보기엔 이 영화를 정의하고 이 영화의 작품성을 높이는 가장 큰 힘이자 핵심이 여기에 있어요.
이번 작이 다루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주인공들을 사진기자로 설정한 초이스가 매우 현명했고, 캐스팅도 정말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케일리 스패니는 사실상 이 영화의 진주인공인데, 연기를 보니 올해 하반기에 <에일리언: 로물루스>에서의 활약이 더 기대되네요.
저는 알렉스 가랜드 감독 작품들의 경우 <엑스 마키나>가 나왔을 당시에 꽤 감명깊고 재미있게 본 편이고, 그 뒤에 나온 <어나이힐레이션>이나 <멘>은 평과 유튜브 클립만 찾아보고 굳이 영화 전체를 보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 나온 <시빌 워>는 <엑스 마키나>와 장르가 아예 달라서 둘을 직접 비교하긴 어렵지만, <시빌 워>는 <엑스 마키나>만큼 영화 속 요소들간의 짜임새나 몰입도가 좋았고 A24 최고 제작비 영화답게 파워가 있네요.
마지막으로 <시카리오>와 비교하면, <시카리오>보다 힘있는 장면들이 일부 있으나 서사는 좀 약했습니다. 그래도 좋은 캐릭터와 긴장감 있는 사실적 연출이 그 단점을 일정 수준 상쇄하는 <시빌 워>는 최근 영화사의 흐름에서 <시카리오>와 같은 동일 선상, 또는 그에 근접한 후계자로 볼 만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평점 :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