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쇼 비즈니스의 창시자로 불리는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죠. 그는 영리한 사업가이자 이상을 꿈꾸는 사람, 다양성을 위한 표상으로 묘사됩니다. 그렇게 <위대한 쇼맨>은 오락으로 통하는 모든 것들에 침을 흘리며 호기심 어린 찬사를 보냅니다.
작중에서 문화 평론가 베넷은 바넘에게 다가가 “당신이 팔고 있는 것은 전부 가짜”라는 일침을 놓습니다. 위 대사야말로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창이 아니었을까요. 더욱 영악한 것은, 이러한 독설의 목적이 청중의 입장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사전에 차단하는 기능으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사기와 착취로 얻은 이익은 경시하면서 가족과 꿈, 포용이라는 보행자적인 주제는 편의적으로 다루는 발판이 되는거죠.
영화 속 화려한 퍼포먼스는 오만한 탈출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쇼 비즈니스는 억압받는 계층을 즐겁게 하고, 그들의 걱정을 잊게 한다고 말하지만 다시 한번 복기할 필요가 있죠. 작품 속 오락이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말입니다. 나아가 어떤 이들이 소모품처럼 학대되고, 분리되어 취급되었는지도요. “This Is Me”로 개인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선언하지만 이는 찰나의 순간일 뿐, 그들 뒤에 숨어 있는 영화의 위선은 관객을 향한 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P.T 바넘의 미화 논란에 대해서는 실제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핵심은 ‘가짜’와 ‘거짓’은 엄연히 다르다는 거겠죠. 실존 인물의 전기와 모티브를 영화에 차용하면서 없는 사실은 만들어내고, 엄연한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위대한 쇼맨>의 광채에 대해서는 이견이 적을 것입니다. 수상 내역이 증명하듯 훌륭한 사운드트랙과 함께 이들의 쇼는 감탄을 자아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건 장애인과 비장애인,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구분된 시선으로 인종과 신분의 편견을 넘어서려는 눈속임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프닝 및 초반 시퀀스를 제외하면 한없이 잔혹하고 폭력적인 영화였네요. 행복을 주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