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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트위스터(1996)와 본편, 그리고 미나리(2020)의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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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스터스를 보고 든 생각인데,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최소 몇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합니다. 첫째, 최대한 큰 화면에서 볼 것. 둘째, 되도록 전편을 보지 말 것. 셋째는 전작 미나리(2020)로 인정받은 정이삭 감독에 대한 기대감을 살짝 내려놓을 것.

 

저는 트위스터스를 일반관에서 봤는데, 하필 스크린이 작은 관이 걸리는 바람에 관람 내내 화면의 양 끝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조건은 실패. 두 번째는...이미 28년 전 영화라지만, 당시 극장에서 재밌게 봤고 이후로도 비디오 등으로 몇 번 더 봤던 터라, 제법 머릿속에 생생하게 디테일이 남아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관람 중에도 끊임없이 두 작품을 비교, 대조하게 되더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트위스터스는 무난한 영화입니다. 문제는 무난해도 너무 무난한 나머지, 보고 나서도 별 감흥이 없다는 거죠.

 

트위스터스는 전작의 설정, 캐릭터, 소품, 심지어 전개 방식까지 거의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막상 전작과는 별 상관없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작 개봉 후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전작의 주연배우 중 이미 두 분이나 작고하신지라 카메오 출연 등으로 이번 작과 연결고리를 만들기도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번 트위스터스에는 전작의 캐릭터가 가진 결기가 없습니다. 전작과 이번 작 주인공 모두 토네이도에 의해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건 같지만, 데이지 에드가 존스가 연기한 이번 주인공이 기상청 직원으로 숨어 살 동안 헬렌 헌트가 연기한 전작의 주인공은 복수심에 이를 박박박 갈며 악착같이 토네이도를 추적합니다. 그 과정에서 결혼생활을 비롯한 인생의 모든 걸 내팽개칩니다. , 전작 트위스터는 그런 그녀에게 학을 뗀 전남편 빌 팩스턴이 이혼서류에 도장을 받으러 찾아오는 것에서 시작하죠.

 

그런데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우리는 이런 캐릭터를 옛날부터 꽤 많이 봐왔습니다. 무언가를 쫓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심지어 반쯤 미쳐 돌아가는 인물 말이에요. 이런 캐릭터의 정점이 바로 영미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뽑히는 모비 딕의 에이허브 선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작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압도적인 자연환경에 도전하는 무모한 인간들의 이야기이자 토네이도판 모비 딕이라 할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주인공은 성별이 바뀐 에이허브였고요. (물론 트위스터가 모비 딕 급의 마스터피스였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대책 없는 낭만주의로 운명론을 돌파하는 이런 드라마에 심장이 뛰는 건 어쩔 수 없죠. )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란 요상한 존재라 저 위험하고 알 수 없는 것들에게 너무나 쉽게 매혹당합니다. 한 발자국만 더 들어가면 백 퍼센트 요단강 익스프레스 탈 게 뻔한데, 기어이 한 발자국을 더 뗍니다. 전작에서 빌 팩스톤이 맡은 남주인공이 딱 그랬죠. 토네이도의 공포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이제 토네이도를 쫓아다니는 정신나간 생활을 청산하려고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막상 토네이도를 다시 보자 눈이 홱 돌아갑니다.

 

그럼 트위스터스는 어떨까요. 처음엔 상마초같던 글렌 파월은 알고 보니 사려 깊고 자상한 남자였습니다. 토네이도에게 미친 척 돌진하는 건 그저 유튜브 조회 수 때문이었고요. 두 주인공 중 하나는 결기가 없고 하나는 매혹이 없으니, 토네이도와 인간의 대결이란 거창한 슬로건과 달리 제대로 라이벌리가 서지도 않을뿐더러 모든 게 밍숭맹숭합니다.

 

토네이도에 대한 입장도 전작과는 달라졌습니다. 전작에서는 토네이도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압도적인 자연현상으로 그려졌죠. 주인공은 가족을 앗아가고 어린 시절을 박살낸 토네이도가 미워죽을 지경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이 만들어낸 이 위대한 현상에 경외감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왁자지껄하던 식사 시간에 5등급 태풍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는 장면을 보세요. 그들은 5등급 토네이도를 '신의 손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삶의 터전을 말 그대로 '초기화'시켜버리는 저 막강한 위력 앞에 막상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토네이도 안에 계측기를 던져넣어 경로를 예측해 사람들이 대피할 몇 분의 시간을 추가로 버는 게 전부입니다.

 

트위스터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그 신의 손길이라 부르던 5등급 토네이도 안에 계측기를 띄우는 데 성공합니다. 토네이도의 격렬한 회오리바람을 버텨내면서 그 중심에 들어서자 신기하게도 평온한 무풍지대가 펼쳐집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미처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힘겹게 자신에게 도전해온 인간들에게 여태껏 수고했다며 신이 살짝 미소 짓는 순간이죠.

 

하지만 트위스터스에서 토네이도는 그저 정복의 대상입니다. 말로는 길들인다고는 하지만, 주인공 일행은 자신들이 만든 장치로 위기의 순간, 토네이도를 소멸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덕분에 전편처럼 인간이 한순간이나마 토네이도의 본질을 파악하고 신의 섭리를 엿보는 듯한 꿈결 같은 장면이 들어갈 틈이 없어졌습니다.

 

연출도 그리 임팩트가 없습니다. 전작과 이번 작 모두 극장이 쓸려나가는데 전작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이 상영 중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히얼스 자니!!!" 바로 그 장면에서 토네이도가 덮칩니다. 토네이도와 샤이닝의 광기를 등치시켜 토네이도의 공포를 배가시키는 명장면이었죠. 그런데 이번 작에서는 아마 프랑켄슈타인으로 추측되는 영화가 상영 중이었는데, 워낙 고전인데다 그리 토네이도와 어울리는 장면도 아니라서 기껏 오마주라고 넣은 장면일 텐데도, 그 어떤 감흥도 없습니다. 차라리 스카페이스나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임팩트있는 장면을 가져왔으면 어땠을까 싶더군요. 뭣보다 이 영화 제작자가 스필버그던데, 차라리 스필버그한테 양해를 구하고 죠스(1975)의 한 장면을 빌려오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트위스터스는 이렇듯 전작 트위스터를 아예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전작과 떼어놓고 생각하기엔 어려운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다 보면 왜 정이삭 감독이 발탁됐는지 알 것도 같아요. 그의 전작 미나리(2020)는 무심한 자연과 어떻게든 이를 극복해보려고 악착같이 발버둥치는 가족의 이야기였습니다. 큰 틀은 트위스터스와 똑같죠.

 

이제 마지막으로 트위스터스를 재미있게 보기 위한 세 가지 조건 중 마지막 걸 말해보죠. 제가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기대했던 건 어차피 CG로 잘 구현될 토네이도가 아니라, 전작 미나리에서 정이삭 감독이 보여줬던 치밀한 인물묘사였습니다. 그런 인물들이 무심한 정도를 넘어 까딱하면 바로 죽음과 직결되는 무시무시하고도 가혹한 자연환경을 맞닥뜨리면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내심 기대했었죠. 하지만 트위스터스에는 미나리에서 보여줬던 그 '생존을 위한 악착같음'이 없습니다. 지금껏 노력해서 일군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 가족이 다시 뭉치는 서글픈 아이러니도, 그 자체로 하나의 스펙타클이었던 윤여정의 명연기도, 트위스터스에는 없습니다.

 

평생 인디 영화계에서 활동하다가 이제 막 헐리우드 메이저로 데뷔하는 젊은 감독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 수도 있습니다. 두 세계는 엄연히 다른 세계고, 메이저에서 성공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인디 시절의 감성을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입장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작 미나리에서 보여줬던 내밀하고도 정교한 인물묘사, 삶의 무게를 힘겹게 버텨내는 처연함의 정서 등 감독 특유의 색채가 마치 토네이도에게 휩쓸린 것처럼 사라져버린 것은 분명이지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니 전작 미나리에서 보여줬던 정이삭 감독의 연출을 기대하시고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이라면... 살짝 기대감을 내려놓고 보시는 편이 좋을 듯하군요.

 

 

PS.

전작의 주연이었던 고 빌 팩스턴의 아들 제임스 팩스턴이 카메오로 출연합니다. 바로 모텔에서 토네이도가 다가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상을 떠는 손님 역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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