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영화 중 하나로, 여러 번 볼수록 점점 더 슬프고, 먹먹하고, 가슴이 미어지고, 마음 한켠이 잔잔하게 아파온다. 비극적이면서도 여운이 남는 결말과 각종 상징, 두 인물의 극단적인 색대비와 장면을 암시하는 대사 등 또다른 인생영화인 ‘헤어질 결심’과도 비슷하면서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제목의 의미는 햇빛을 받은 후 바르는 썬크림으로, 과거의 쓰라린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이다.
성인이 되어 아기를 가진 소피는 캠코더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 아버지 캘럼과 함께 튀르키예 여행을 갔던 기억들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캠코더에는 거의 대부분 자신의 모습밖에 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찍은 자신의 모습과, 아버지가 찍은 자신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흐릿하고 파편적인 기억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스스로 과거를 재구성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행동과 모습은 그녀의 기억과 상상을 통한 내면세계 속 재구성된 존재이다. 하지만 캠코더를 둘러보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녀의 내면세계 안쪽으로 점점 스며들게 된다. 결국 그녀의 내면세계 속 과거 아버지의 내면세계가 창조되며 현재의 그녀를 불러들인다. 이는 빛이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검은 공간으로 묘사되며, 아버지 캘럼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시선을 회피한 채 춤을 추고 있다. 이 작품이 가장 뛰어난 점은 인물의 감정선과 내면을 다양한 사물이나 촬영 구도를 통해 매우 간접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 소피와 캘럼 두 인물들을 색조와 행동, 화면에 비추어지는 모습을 통해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며 왜 그들이 상호작용 할 수 없는지에 대한 비극성을 극대화시킨다.
먼저 소피는 삶과 미래를 추구하는 존재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연애 같은 청소년들의 관심사에 푹 빠지고, 어른들과 다이빙을 하거나 당구를 치고, 캠코더 앞에서 뉴스 기자를 흉내내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소피가 밝은 노란색에 안정감을 느낀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기에 그녀의 내면세계 속 시선을 따라가보면 방의 벽지와 물 속 카메라, 자유이용권 등 노란색 사물이 많다. 또한 그녀의 얼굴은 캠코더의 화면에서 과하게 클로즈업되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캘럼은 죽음을 추구하는 존재로, 과거에 이혼하고 딸을 떠난 것에 대해 상당한 죄책감과 트라우마가 있어 보인다. 또한 그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는 캠코더를 들었을 때 항상 딸 소피의 모습만을 비추었으며, 소피가 캠코더를 들고 있을 때조차 그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모습은 거울, 꺼진 TV 화면, 유리 등에 반사되어 보일 때가 많고, 뒷모습도 자주 나온다. 그는 캠코더로 자신을 찍는 소피의 질문을 회피하고 딸과의 노래 무대에 절대 나가지 않는 등 자신을 향한 시선에 대해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세계마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대비가 가장 강조되는 장면은 아버지가 팔의 붕대를 푸는 장면으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노란색 방에서 편하게 성인 잡지를 읽으며 거짓말하는 소피의 모습과 어두운 파란색 방에서 붕대를 자르고 있는 가위에 팔을 찔려 피를 흘리고 있는 캘럼의 모습을 통해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캘럼의 모습은 영화 내내 불안정하게 묘사된다. 그러기에 그는 명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로 도피한다. 화면에 나타나는 자신의 모습을 회피한 채 어두운 밤 바닷 속으로, 카펫이 가득한 방으로,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는 거울과 TV 화면으로, 자신의 작은 침대가 아닌 소피가 자는 큰 침대로 도피하며 안긴다. 그는 아마 딸과의 마지막 여행 직후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죽음 이후 자신만의 내면세계 속에서 시선을 피한 채 춤을 추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캘럼은 소피에게 모든 일을 아빠한테 말하라고 하지만, 어린 나이의 소피는 캘럼의 마음을 알 수 없었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내면세계 속에서 캠코더에 담지 못했던 아빠의 뒷모습을 최대한 바라봐주려 한다. 비록 아버지의 정면을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난간 위에 위태롭게 서 있거나, 바닷속에 자신을 오랫동안 담구는 행동 모두 실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과거에 자신에게 내주었던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 그가 겪었던 아픔과 고통을 이렇게라도 가늠해보려 한다.
불완전한 기억을 명분으로 창조해낸 내면세계 속 사건들은 두 사람이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시간대 속 서로에 대한 죄책감과 안타까움이 묻어 나오게 한다. 가장 가슴 아팠던 장면은 딸이 아빠에게 깜짝 파티를 해주려고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유서로 추정되는 물건을 쥐고 뒷모습을 보인 채 오열하는 캘럼의 모습이 디졸브되는 장면이다. 아프고 불안정한 아버지를 여행 끝까지 바라보지 못했던 순수한 딸의 모습, 그래서 앞모습을 보임에도 햇빛을 가리는 척하며 자신의 시선을 숨기는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보인다. 뒷모습을 보인 채로 오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지막 여행에서까지 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깨달음의 눈물로 보인다. 충격적인 결말부는 각자의 회상과 안간힘이 서로 맞물리지 못한 채 으스러지는 비극을 보여준다. 캘럼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몸을 뒤로 돌린 채 소피에게 퀸의 ‘under pressure’에 맞추어 같이 춤을 추자고 한다. 소피는 처음에 거절하지만 마지못해 함께 춤을 춘다. 이는 소피와 함께 노래를 부르지 않은 캘럼과 대조된다. 또 아버지의 내면세계 속에 소피가 들어온다. 아버지는 여전히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시선을 회피하고 춤을 추고 있다. 아마 아버지는 딸에 대한 죄책감에 벗어나지 못한 채 딸과의 마지막 춤을 안식처로 삼아 과거의 내면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는 아버지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내면세계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 두 장면이 겹치게 되며, 둘의 내면세계가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딸의 내면세계에서 아버지는 시선을 회피한 채 딸과 마지막 춤을 춘다. 아버지의 내면세계에서는 딸이 아버지를 끌어내기 위해 들어간다. 딸은 아버지를 부르며 깜빡이는 빛 속 아버지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소피는 고통과 불안에 둘러싸인 채 도피하고 있는 아버지를 깨우고 끌어내리려고 하고, 마침내 캘럼은 회피하지 않고 딸에게 정면으로 안긴다. 딸의 품에 안겨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주는 이 하나 없었음을, 자신의 마음과 고통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고통을 발산한다. 그녀는 내면세계에서라도 아버지의 뚜렷한 정면을 보았지만, 결코 그를 다시 끌어내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한 소피가 아버지의 손을 놓으며 암흑 속으로 다시 떨어뜨리는데, 아마 현재의 소피가 가진 죄책감을 과거 자신의 모습으로 투영시킨 것 같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문제가 아닌, 변하지 않는 과거의 특성에 대한 회상이 가질 수 없는 불가역성일 뿐이다. 또한 회상에 있어서 ‘기록’과 ‘기억’이 가지는 서로 다른 시차적 특성이 작용한 것 같기도 하다. 캘럼은 새벽에 홀로 몇 시간 전, 몇 분 전에 캠코더로 찍은 딸의 모습을 재생하는데, 이는 자주 만날 수 없는 소피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흘러 나가는 시간의 누수를 막기 위함인 것 같다.
한편 동일한 영상으로 되풀이되는 기록과 달리 어린 시절 아빠의 모습을 회상하는 어른 소피의 기억은 불완전함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깜빡이는 조명 아래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캘럼을 붙잡으려는 소피의 안간힘은 위태롭고 불안했던 형상과 그 의미 사이에서, 기록과 기록 바깥의 기억 사이에서 그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을 삼키는 되감기의 몸짓이다. 불가역성에 대한 비극이며 끌어안으려 할수록 넘치고 사라지는 역설적인 슬픔이다. 애프터썬은 기록과 기억 사이에 놓인 차이, 그리고 타인의 고통과 우울을 비로소 끌어안고 보듬어 줄 수 있도록 성장하는 기록물이다. 소피는 성인이 되어 아기를 가지게 되었고, 이제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고 끌어안을 수 있다. 비록 아버지는 과거의 불변성을 이해하며 깜빡이는 내면세계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녀는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을 간직한 채 이를 자식에게 따뜻하게 전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