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 건축에 담긴 인간/몸의 미학 시리즈
의 후속편입니다.
순서는 상관없습니다만, 아래 목차로 구성된 <상편>을 먼저 읽으시면 좋습니다. :)
1. 브루탈리즘의 대표적인 건축가들
르 꼬르뷔지에(1887-1965)
"집은 살기위한 기계"
폴 루돌프(1918-1997)
극혐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건축물이 철거당한...
안도 다다오(1941-) ★
빛과 (노출)콘크리트의 건축가
2. 바우하우스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 건축가들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5)
"기술이 끝나는 곳에서 건축이 시작된다"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
"적을수록 풍요롭다(Less is More)"
마르셀 브로이어 (1902-1981) ★★
"어떻게하면 이 곳을 망치는 걸 피할 수 있을까?"
브로이어가 설계한 몽블랑 절벽의 스키 리조트, 르 플라이네 (Le Flaine, 1960~1976)
3. 미국의 모더니즘 건축가들
루이스 설리번(1856-1924)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 모더니즘의 아버지
위 건축명제는 독일영화 <운디네>에서 베를린 도시역사박물관의 도슨트인 주인공이 강조할 정도로 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디자인 원칙입니다. 이러한 기능주의 미학은 산업화 시대에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빠르게+높이 짓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었는데요. 개인적으론 이때 건축 미학과 공학의 간극이 좁아지며 경계가 가장 허물어져있던 시기라 생각합니다. (21c초엔 다시 4/5년제로 어긋나며 분화되더라는...?)
어이 앞에 차량!! 같이 좀 가야지 혼자 너무 빠르게 막 나가는 거 아냐?
설리번은 기계미학을 좋아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천박한 치장술 취급을 받던 장식의 비율(proportion)에 탐닉했습니다. 마치 '겉과 속' 관계처럼 장식이란? 단순히 껍데기가 아니라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유기적인 오너먼트라 이야기하며, 아르누보 양식과 모더니즘의 태동에 기여한 건축가기도 합니다. 특히 시카고 대화재 이후 도시재건 건설붐에 뛰어들어 이 영화에서 강조하던 철강(steel)으로 고층빌딩 짓는 데 크게 활약했지요. (그러나 후속 세대/제자의 이름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훨씬 더 잘 알려진...)
영화 초반 라즐로와 항해를 같이 해오면서 마치 은혜를 갚아야할 것 마냥, 내가 당신을 꼭 찾겠다면서 행운의 동전을 던져준 한 인물이 나왔는데요.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연같던 이 사람을 카메라가 유난히 의미심장하게 담아놓고는 다시 안나오더라구요. 문득 (제 똥눈에) 작품은 그렇게까지 임팩트있지 않아보이지만, 모더니즘 철학의 진수를 담은 매우 인상적인 명언을 남겼고, 한 때 같이 일했던 제자 덕인지 모더니즘의 아버지란 소리를 듣게된 루이스 설리번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에서 모더니즘이 라이트를 통해 꽃을 피웠듯, 라즐로가 미국땅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해준 뒤 사라지는 씨앗같은 존재랄까요? :)
행운을 빌며 그와 헤어지고 필라델피아를 향해 달려갈 때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흐르던 ost 음악은 아름답기 그지 없더란!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공간은 예술의 숨결이다", 지역의 자연환경과 함께 어울리는 유기적인 건축가
영화에서 커뮤니티 센터를 짓던 중 라즐로에게 미국에 있는 대리석도 아름답다며 그걸 쓰자고 제안한 한 직원이 있었는데요. 라이트는 유기적인 측면에서 지역/현장의 고유한 재료(material) 사용할 것과 자연친화를 추구했습니다. (feat.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특히 구겐하임 미술관과 낙수장(fallingwater)이 잘 알려져있지요. 묘하게 자연과 어우러지는 한국 전통건축의 DNA/정서와도 참 잘맞는 건축가란 생각이... ㅎㅎㅎ
담양의 소쇄원처럼 펜실베니아의 폭포 위에 세워진 낙수장 (Fallingwater House, 1936~1937, 1939)
"자연을 공부하고 사랑하고 가까이 하라, 그건 절대로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다"란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듯한 작품을 여기저기+끊임없이 만들어서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한 건축가입니다. 그러나 유교걸은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자유분방한 사생활 및 논란가득한 발언으로도 유명한, 홍상수/노만 폴란스키 감독 못잖은 문제적 인물이기도;;;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 1943, 1956~1959)
그는 자유롭게 확~ 열린 평면으로 바우하우스 같은 유럽의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많이준 미국 건축가입니다. 르 꼬르뷔지에 만큼이나 엄청난 영향력을 지녔던 모더니즘의 양대 산맥이자, 건축계의 돈키호테라 불리우곤 하지요. 개인적으로 전 이 영화의 주제가 자유 의지(free will)와 자신의 선택에 따른 빛과 그림자라 생각하는데요. 라이트는 동양 지역에 대한 관심으로 도쿄에 자유 학원이란 여학교를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식민지배를 받던 우리나라의 온돌 문화를 보고는 미국에 바닥 난방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구요.
한편, 영화에서 해리슨이 라즐로를 찾아와 이게 네 작품이냐며 보여준 사례 사진이나 에필로그의 작품들 중엔 바우하우스 출신 못지않게, 본투비? 미국인이던 라이트의 작품 느낌이 나는 것도 있더군요. 무엇보다 반 뷰런 커뮤니티 센터 지하에 있던 우수처리장의 가느다란 기둥들을 보니, 마치 기둥들이 천장에서 서로를 지탱하며 나무 숲처럼 펼쳐지는 존슨왁스 빌딩이 떠오르더라구요. :)
존슨왁스 빌딩(Johnson Wax Headquarters, 1936~1939)의 사무실 작업공간(The Great Workroom)
라이트는 초창기에 지역주민을 위한 교회(Unitarian Church/엄격한 유일신교?)를 설계했습니다. 이 때 눈이 부시도록 빛이 왕창 퍼부어지는 제단을 만들었지요.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를 닮은 영화 속 작품과 같이 햇빛이 핀포인트 조명처럼 압축적으로 떨어지진 않지만, 주변에서 내내 빛을 가리다 중앙 무대에서 극적으로 빛을 마주하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나저나 일본식, 마야식 등 온갖 다양한 종교시설 문법이 짬뽕으로 들어가 있으며 이름마저도 '유니티 템플' 이랍니다. (유니타리언은 자유주의 종교운동에 의해 유니버셜리즘으로 변모하여 기독교계에서 이단=끝이 다름으로 판정받아 떨어져 나간다는... )
Unity Temple (유니테리언 유니버셜리스트 교회, 1905~1908)의 자연광으로 충만한 동양식 천정(天井)의 예배당
루이스 칸(1901-1974) ★★★
"형태는 경이로움에서 비롯된다(Form comes from wonder)" 빛과 침묵의 건축가
영화의 도입부는 소련군이 독일 점령지에 갇혀있던 유대인 조카딸을 해방시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집을 찾아주겠단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데요. 루이스 칸은 에스토니아계(구. 소련) 유대인으로 영화 속 라즐로처럼 펜실베니아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무엇보다 로고 형태를 보니 이건 빼박 칸의 오마주인 것 같더군요. :) △□○
그는 인간의 필요(need)와 욕망(desire)에 주목하였으며, 작품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모더니즘 엘리트주의 건축가들에게 한방 먹였던, 모더니즘 최후의 거장로 불리는 건축가입니다. 도서관이란? 책을 담는 게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을 담아야 하고, 책을 읽으려하는 자는 빛을 쫓는다는 생각으로 만든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도서관이 대표작입니다.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도서관 (phillips Exeter Academy Library, 1972)
초반에 해리(아들)가 해리슨(아빠)을 위해 라즐로에게 의뢰했던 서재 공간 디자인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소크(Salk) 생물학 연구소와 닮아 보입니다. 태평양 바다(석양)를 향해서 중앙무대가 활짝 열려있는 가운데, 양옆의 연구실(room)들은 빛을 피한 사선 형태거든요.
소크 생물학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 1965)
태양을 피하고 싶었던 연구소의 실(room)들... :)
설마...... 아버지 해리슨은 라즐로(삼촌)를, 아들 해리는 라즐로의 조카를 강간/추행한 게 유전자(생물학/행동생태학)의 신비는 아니겠지요. 딸내미는 친절하던데, 아들넘은 자유분방하게 자꾸 선을 넘는 것이 윗물에서 잘못 보고배운 건지, 아니면 주변 지인들과 잘못 어울려 다녔던건지... 밖에서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같은 편견 가득한 쌉소리는 듣고다니지 말아야 할텐데... 에효... feat.<친구> )
그나저나 반 뷰런 일가는 아빠와 아들(son) 이름이 뒤바뀐 개족보의 가족이더군요. 아들 해리가 아빠 해리슨(-son)을 애타게 찾아다닐 때 지하의 거대한 우수처리장 모습에서 솔직히 저는 라이트 작품에 앞서 가우디가 만든, 아직도 짓고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 가족 성당)의 모던한 (나무같기도 한) 기둥들이 떠올랐습니다. 이 때 가우디는 중력을 떠받치는 힘(power)의 구조적인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거꾸로 매달아보는 디자인 실험을 했었습니다. 즉 자연의 생태학적 원리에서 삶의 무게를 극복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려한 건축가였지요. 전기(pre-) 모더니즘 시기의 건축가였지만, 오히려 후기(post) 모더니스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가우디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지은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1882~2026?)의 빛이 찬란하게 비칠 때의 모습
가우디 이후로 <스페인 건축 DNA>에는 힘= 하중 x 휨 모멘트(moment)가 눈에 확~ 드러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믿고 감상하던 제 최애 건축가가 제2의 가우디라 불리는 산티아고 칼라트라바였으나, 이탈리아 헌법 60주년을 기념하고자 베니스에 지었던 "헌법의 다리"로 인해 법정에 서서 빼박 설계 오류!란 판정을 받게 되었더군요. (실은 뼈대들이 움직이는, 조 단위가 훌쩍 넘는 공사비의 작품들로 인해 라즐로처럼 언제나 욕을 퍼먹는 건축가이기도...)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1892), 칼라트라바가 베니스에 지은 헌법의 다리(The Ponte della Costituz, 2008), 두바이에 짓고있는 크릭 타워(2016~)
다시 루이스 칸 이야기로 돌아와, 말년에 루이스 칸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을 설계했습니다. 이 때 영화 속 아들넘 해리처럼 공무원이 중간에서 공사대금을 삥땅 치거나 갑자기 공사가 중단되는 등 기간이 늘어지면서 파산했음에도, 칸은 민주주의를 향한 신념으로 끝까지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미완으로 남았다가 82년에 완공되었구요.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The National Assembly Building in Dhaka, Bangladesh, 1961~1982)
한편 칸은 경제관념이 부족해 늘 가난했으며 급하게 강의하러 가다가 신분증도 없는 남루한 노인의 모습으로 기차역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객사했습니다. (솔직히 전 에르제벳이 화장실에서 쓰러져 죽은 줄 알았던...) 루이스 칸은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처럼 허름한 외형(form) 탓에 죽었을 때 시신이 노숙자 취급을 당하며 방치되었던 대표적인 일중독자(worker-holic) 였거든요.
약물중독 라즐로로 인해 섹스를 나눈 뒤, 화장실에서 쓰러져 죽을 뻔한 에르제벳
왠지 아무도 모르는 해리슨의 실종/죽음처럼 이 위대한 두 건축가들의 엔딩은 그 비참한 죽음의 형태(form)마저 예술의 아이러니함 같다고 느껴집니다. 우주의 먼지처럼 거대한 역사 속에서는 한낱 미물이자 결국 보잘것 없이 사라지게 될 인간이, 그가 남겨놓은 흔적/건축/발언으로 인해 오~래도록 기억되니까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했던가요. 참고로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던 이 명언에서 예술은 art가 아니라 techne, 즉 사람을 살리는 (의료)기술이었답니다.
칸의 사후에 완공된 이 국회의사당은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전쟁(Bangladesh Liberation War, 1971)에서 승리한 이후 더욱더 사랑을 받게 된...
또한, 루이스 칸은 역사적인 고전 건축(그리스, 로마, 이집트)을 답사하면서 잠재하는 물질적인 존재성을 강조했었습니다. “벽돌아~ 넌 뭐가 되고 싶니?” 란 말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문득 영화의 후반에 이탈리아에서 떼어온 흰 대리석이 벽돌/관짝처럼 덩그러니 중앙에 놓여 거꾸로 뚫린 십자가 빛을 온전히 받는 장면을 보니 저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건축이란 천연의/가공된 재료(material)들을 가지고 조화(harmony)로운 무엇가로 다시 변형해내는 작업이니까요. 심지어 에필로그에선 제1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라즐로 토스 전시회 제목이 '과거의 현존/현전' (the presence of the past)인 걸 보며 소름이 쫙~ ㄷㄷㄷ
이탈리아 광산의 대리석은 미국땅으로 와서 천장의 거꾸로 뚫린 빛을 온전히 받아 마치 묘비석? 같은 제단이 되었던...
루이스 칸이 생에 마지막으로 설계한 작품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4가지 자유공원(Franklin D. Roosevelt 4 Freedoms Park) '입니다. 대통령 루즈벨트(1882-1945)는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뒤, UN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데요. 그가 연설했던 4가지 자유인 의사표현(언론), 신앙, 결핍(궁핍), 공포로부터의 자유는 UN의 세계인권선언에 포함되었습니다. 루즈벨트를 추모하며 뉴욕시의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그렸던 루이스 칸의 공원 설계도는 그가 죽을 때 가방 안에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무려 칸의 사후 38년 뒤인 2011년에 실현되었습니다. (미국 히어로물에 종종 등장하는 퀸즈버러 브릿지가 있는 뉴욕 이스트강물 위, 루즈벨트섬의 모서리/끝단에 위치한...)
스파이더맨(2002),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 등 미국 히어로물에 등장하는 맨하탄~퀸즈 사이의 루즈벨트 섬과 그 모서리에 위치한 4가지 자유공원
루이스 칸은 영화 오프닝에서 괴테의 입을 빌려 말했던 '자유/구속'을 자기 생(生)의 마지막에 그렸던 건축가라고 할 수 있을듯 합니다. 빛을 쫓는 도서관과 생물학연구소가 대표작이면서, 삶의 형태를 구속하는 법(rule)을 만드는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이 그의 유작이었으며, 자유를 선언하며 인권의 기반을 다져놓은 루즈벨트의 추모공원이 그의 마지막 설계안이거든요.
한편 건축가 라즐로가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처럼, 해리슨이 추모하고팠던 어머니의 이름 마거렛 리 반 뷰런 또한 작품명으로 기억될 텐데요. 여러모로 루이스 칸은 건축 이미지들 뿐 아니라, 그의 삶 마저도 영화 속의 빛/그림자같은 관계였던 라즐로/해리슨 두 사람 모습에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인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점점 길이 좁아지는 삼각형의 린덴 나무 열식 끝에는 루스벨트 흉상이 있으며, 가장 끝단에는 드넓게 펼쳐진 강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테라스가 똭!
4. 유대인 박물관의 올리브 정원
다니엘 리베스킨트 (1946-)
Q. 삶의 현실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때 바깥의 하늘을 올려다 본다면...?
제 진로가 건축에서 도시로, 그 다음엔 환경으로 옮겨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해체주의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폴란드계 유대인, 괴테 메달 수상자!)의 야외전시 정원이지요. 제가 어릴적 시간/돈이 부족하다며 급하게 뽈뽈거리고 이동해다녔던 유럽 배낭여행의 경험들 중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 속에 각인되었던 작품입니다. (인터미션, 찰칵!)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지은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 (Jewish Museum, 1999 완공, 2001 오픈)
건축물의 형태는 유대교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해체했고, 스킨은 상처가 난 것처럼 창을 찢어발겼으며 밟으면 끔찍하게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려펴지는 얼굴 모양의 (산화될?) 동판을 바닥에 쫙 깔아두었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숨이 턱턱 막히는 49개의 기울어진 기둥들이 서있는데, 워낙 폭이 좁고 답답해서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면 올리브나무 숲이 보입니다. 왠지 마지막 영화 속 작품 설명과 매우 유사하지요? :)
7×7 = 49개의 기둥이 있는 올리브 정원
그 이후에 지어진, 유대계 미국인 피터 아이젠만이 설계한 독일 베를린 도심의 홀로코스트 추모공원은 개인적으로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개념이기는 하다만, 너무나 직설적으로 거대한 관짝이 늘어선 모습이 꼭 공동묘지 같더라구요. 솔직히 저는 영화 속 에필로그에서 마지막 조카딸 조피아의 단호한 멘트가 소름끼치도록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유럽 땅에서 핍박 받고 쫓겨났던 유대인들이 최근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그 처지가 뒤바뀐 것처럼, 도심부에 이런 대규모 부르탈리즘?스러운 삭막한 공원을 만든다는 게 역으로 독일 시민들에게 폭력적인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더라는...
베를린에 2,711개의 콘크리트 블록을 박아넣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Holocaust Memorial, 2003~2005)
특히나 독일은 다른 곳과 다르게 역사교육도 빡시게 잘하고 있고, 자가성찰도 열심히 하는 나라라는 인상이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대체 이건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걸까요. 아님 기억하라고 협박하는 걸까요.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특히 아무 생각없음으로 인해 악/惡이 생겨나곤 하지만, 그 의미는 곧 나 또한 비인간적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유럽인들이 일상에서 지인을 추억하며 힐링하는 묘지공원에서의 산책문화를 우리네 성묘문화와 비슷하다 여기는 편이라, 지나치게 강렬하고 삭막하며 거대한 이 작품은 좀…
솔직히 건축가에게 그 동네/근린(neighborhood)에서 살고있을 베를린 시민의 일상을 상상해본 적이 있냐고 묻고싶어 지더군요.
소통의 방식/문법/매너가 매우 다른 두 유대인 건축가의 작품. 이 두 사람은 칼라트라바의 랜드마크(landmark) 미학에 대해 한바탕 논쟁이 붙은 적이 있기도…
>> NEXT : 인간/신의 계획과 데스티니
예전에 <운디네>를 하나하나 찢어발기면서 해석한다고 욕을 먹은 적이 있었으나, 실은 종특/직업병입니다. ㅋ 개인적으로 라즐로에게는 루이스 칸의 느낌을, 해리슨에게서는 필립 존슨의 느낌을 받았는데요. 이제부턴 줄거리를 알파(Α)부터 오메가(Ω)까지 하나하나 해체/해부하는 리뷰를 써볼까 합니다.
실은 평소에도 "난 한놈(우물)만 패(파)!"를 추구하는 편... ㅎㅎㅎ :)
A : 자신의 건축/작품은 독일에서 침식당하지 않지만, 자유를 찾아 배를 타고 미국 땅(자유의 여신상)의 품에 안긴 라즐로
Ω : 선조의 고향땅이자 조카손녀의 품으로 돌아간 뒤, 배를 타고 자신의 건축/작품을 드러내고자 도시가 침식당하는 베니스를 찾은 노년의 라즐로
아무래도 <오펜하이머>처럼 화면비(1.43:1)로 책갈피를 꽂아놔 주면 감독님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더 편한데, 이 작품은 척추의 뼛조각을 몇개로 구성해야할지 감이 안잡히더군요. 일단 1막이 1947~52(5년), 2막이 1953~60(7년)이길래 5개와 7개로 골조/뼈대(structure)를 짜맞췄습니다. ㅋ
혹, 자재(material)를 찾을 에너지/시간이 부족하면 골다공증처럼 몇개 슝슝 빠질 수도요.ㅋ
[서막] 인간의 미래/욕망을 위한 (자위)도구 : 계획
▶"건축가는 상류층의 창녀다" - 필립 존슨
[01] 출산/출항과 어머니/자유의 여신상
[02] 4촌은 내편이 아니더라?, 이웃4촌
[03] 트라이시클과 캔틸레버 의자, △□○
[04] 빛, 말과 글, 독서 그리고 NEWS
[05] 빛을 어떻게 막을/비출 것인가
[인터미션] 기억의 박제, 하모니의 순간포착 : still♥steel
▶ 한지붕 한가족을 이루는, 인생 갈림길의 증거
[06] 몸의 구속, 고통/쾌락
[07] 기준선을 다시 긋는다고?, 선 넘는 행위
[08] 몸과 건축, 어울려사는 유연성
[09] 고대 로마의 원석, 잠재력을 가진 존재
[10] 엘리트주의와 카르텔의 혐오, 그리고 창녀
[11] 종교와 정치, 그리고 언어/몸의 소통(폭력)
[12] 시공간의 이동, 그리고 기적/예술의 순간
[에필로그] 베니스의 상인 : the 1st
▶ 미래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의 상승시 직격탄을 맞게될 지반 침식중인 도시
출처 : The 2019 Flooding of Venice and Its Implications for Future Predictions (The ISMAR Team)
* 싱크홀을 걱정해야하는 우리나라 또한 무분별한 도시개발과 기후위기는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닌듯...
출처: 본인 브런치스토리
https://brunch.co.kr/@nashira/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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