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는 간단합니다.
"선의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진행과 결말까지 결여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주인공은 예의바른듯 하지만 악의에 찬 소년 입니다.
수업의 연장인 퇴비 만드는 일을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힘으로 빠지려다 다른 학생들과 주먹다툼이 벌어집니다.
(전시 일본은 물자 부족으로 어린 학생들을 이런 생산/수집 활동에 내몰았습니다)
학교가기 싫어진 주인공은 돌로 자기 머리를 쳐 피해자가 됩니다.
새엄마인 이모를 절대 인정안합니다.
이모라고 하지도 않고 이름으로만 부릅니다.
수차례의 문병 요청에 마지못해 짧게 응합니다.
이후 새엄마인 이모의 행방불명에 돌연듯 애착을 하는 변화를 갖습니다.
그리고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듯 왜가리를 따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갑니다.
겉보기엔 아름답지만 악의에 가득찬 저주스런 세계 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 허덕이는 새들은 식인도 서슴치 않습니다.
페리칸들은 아기의 영혼을 먹어치우며 주린 배를 겨우 채웁니다.
(아기를 가져다주는 황새의 민속 우화와는 정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앵무새들도 사람이던 코끼리던 먹어치웁니다.
선악이 모호한 생존만 남은 세상인데 또 어떤 부분은 화려하고 향락을 누리고 있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갑자기 이모를 어머니라 부르고 급 화해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악의의 이세계를 구축했던 큰할아버지는 주인공에게 선의의 세계를 만들라고 요구하지만 주인공은 자격이 안된다고 거부합니다.
약속 위반에 격분한 앵무새 왕의 난입으로 세계는 붕괴되지만 모두 현실로 잘 피신합니다.
영화를 보고는 허무하고 씁쓸했습니다.
반전과 자연과의 공존을 얘기하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굳이 제로센을 노출시키는 태도를 본인의 추억과 향수라고 치부하더라도 이세계에서 조차 모호하게 하는 행위는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특히 앵무새들은 굳이 나치독일군을 연상시키는 심볼과 duch라는 문장을 씁니다.
비판의식은 모호하고 생존을 위한 불가피함을 피력하는 것에 감독이 역사의식마져 없어진거 같아 당황스럽습니다.
이 영화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 전체가 지원해서 만들었다고 할만큼 타 프로덕션의 인력들이 대거 참여해서 7년여의 기간안에 탄생했습니다.
이게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 완성도를 이룬 작품인지 의문입니다.
감독님 자기복제적인 느낌이지만 아름다운 그림과 설정 잘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주제의식은 30년전 붉은돼지나 나오시카에 비해서도 한참 뒤쳐져 있네요.
스티븐 스필버그가 파벨만스에서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조명했는지 보셨나요?
도대체 어떻게 은퇴하실겁니까?
전 미야자키 하야오가 늙어가면서 선의와 악의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말하려는 것 같았네요
바람이 분다도 주인공의 양면성을 표현했고 이 영화에서도 악의와 선의 사이에서 주인공의 선택, 관객의 선택을 강조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