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준지 감독이 연출한 <오키쿠와 세계>는 19세기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딸인 오키쿠(구로키 하루)는 비오는 날 절을 방문하다가 화장실 앞에서 폐지로 생활을 하는 츄지와 인분을 팔아먹고 사는 야스케를 우연히 마주칩니다. 오키쿠는 사실 잘생긴 츄지를 맘에 들어 하지만 신분 차이 때문에 쉽게 마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츄지는 더 이상은 폐지로 생활을 하기 힘든 상황이 되자 야스케와 함께 일을 하기로 합니다. 에도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인분을 수거하고 논에다 뿌려주며 돈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인분을 수거할 때도 돈을 주고 사는 거죠.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측면이 있지만 당시엔 실제로도 그랬다고 하네요.
아무튼 계절은 바뀌고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던 오키쿠의 아버지는 길을 나서다 무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뒤따르던 오키쿠 마저 사고를 당해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은둔 생활을 하던 오키쿠를 세상으로 나오게 한 건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키쿠는 용기를 내어 츄지에게 고백하고 츄지 또한 문맹이었는데 글공부를 시작하죠.
영화 시작과 함께 비위가 약한 관객이라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게 하는 장면이 스크린으로 펼쳐집니다. 바로 인분을 담는 장면인데요. 꽤나 긴 시간 동안 야스케가 하는 작업을 보여주죠. 다행히(?) 영화의 99퍼센트가 흑백으로 진행되어 조금 덜 하긴 하지만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 공동주택 지역의 화장실 장면은 좀 참기 어렵더라고요 ㅎㅎ
<오키쿠와 세계>는 몰락한 가문과 최하층의 두 인물에 대한 관계 그리고 에도 시대 때 몰락한 사무라이와 힘으로서 부당하게 권력을 차지하는 무리들을 비교하며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부분도 인상적이긴 하지만 공동주택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당대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 그 부분이 참 좋더라고요. 오키쿠와 아버지의 관계도 디테일하고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묘한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도 흥미로웠고요.
근 몇 년 동안은 학원멜로물이 우리나라에 많이 수입되고 있는데 이렇게 귀여운 사랑 고백을 하는 커플의 모습을 보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구로키 하루는 안도 사쿠라와 함께 30대 일본 여배우를 대표하는 모습을 이번 작품에서도 증명하고 있어 다시 한 번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