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도시 시리즈를 두고 커뮤니티에서 사용된 비유 중에 '김치찌개'가 있던데, '김치찌개 맛집에 김치찌개 먹으러 가서 맛있게 먹고 나오면 그만' 뭐 이런 표현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이번 영화는 그렇게 맛있는 김치찌개가 아니었어요. 예전에 가던 동네 맛집의 주방장이 바뀌었고, 적당히 예전 레시피를 어설프게 버무려 따라는 했는데 전혀 그 맛이 안 나왔다고 하면 적절한 비유일 것 같네요.
커뮤니티에서 크게 혹평받았던 범죄도시 3편을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게 봤는데, 영화 곳곳에 뿌려진 유머가 꽤나 잘 짜여졌고 효과적이라고 느껴서였습니다. 전작들 대비 악역(들)의 카리스마가 떡락하면서 극 전체의 긴장감도 확 죽어버리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반쯤 코미디 영화로 즐긴 입장에서는 용인할 수 있는 결점이었구요.
이번 작품 제작 과정에 있었던 큰 변화는 2-3편을 연출한 이상용 감독이 물러나고, 20년 경력의 스턴트이자 오랫동안 무술 감독으로 경력을 쌓았던 허명행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범죄도시 시리즈 1-3편 뿐 아니라 숱한 대작들의 액션 연출을 구성해서 호평받은 바 있어 '액션 장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죠.
이상용 감독은 연출 데뷔작인 범죄도시 2편이 바로 천만을 달성해서 주목받았는데, 사실 그 이전에도 촬영장에서 감독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조감독으로서 오랫동안 경력을 쌓아와서 그런지 영화 연출의 기본기 자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뭐 두드러지게 훌륭하거나 독창적인 장면들은 없을지언정 상업영화로서 기대치를 충족하는 무난한 만듦새였어요.
한편 허명행 감독은 범죄도시 4 이전에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연출 데뷔를 했는데, 그게 바로 마동석 주연의 <황야>입니다. 액션은 볼만 했지만 여러모로 굵직한 결함들이 산재한 졸작이었죠. 이 감독이 범죄도시4 연출도 맡는다 해서 걱정이 좀 됐었는데... 역시 만듦새가 전작들보다 못합니다.
전작들과 내용적으로 차별화되는 부분은 주인공 마석도에게 감정적 동기 부여를 심어줬다는 겁니다. "나쁜 놈은 그냥 잡는거야~"라고 단순쌈박한 명제를 시원시원하게 외치던 마석도에게 희생자 어머니와의 뜬금없는 드라마를 족쇄처럼 채웠습니다.
이 무거운 감정선을 까는 연출 자체가 좀 촌스럽고 어색할 뿐더러, 제가 볼때는 시리즈 전체의 색깔과도 안 맞습니다. 이게 초반에만 나온 것도 아니고 잊을만하면 수시로 마석도의 무거운 마음을 관객들에게 일깨워주다가 결국 종반부의 괴상한 추모 씬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드라마가 영화에서 가장 별로였던 대목이었습니다.
덧붙여 이번 작품의 대사들도 전작과 비교해 말맛이 떨어지고 상투적이죠. 빌런이 과묵한 탓도 있지만 기억에 남는 대사가 참 없는 편입니다.
3편 대비 가장 크게 퇴화한 부분은 엄연히 시리즈의 중심축 중 하나인 코미디였습니다. '초롱이'를 비롯한 감초 조연들을 이야기 전개 속에 적절히 활용하면서 능청스럽게 툭툭 던지는 애드립으로 비교적 위화감 없이 웃음을 끌어냈던 3편과 달리, 너무 노골적으로 시리즈 밈의 후광에 기대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4편의 전개에 맞게 코미디를 짜임새 있게 설계한 게 아니라, 범죄도시 시리즈를 경험하면서 대중이 체득한 유머 코드를 대충 아무렇게나 쑤셔넣었다는 겁니다. 단적으로 인기 캐릭터 장이수의 과한 활용이 그런데, 이 캐릭터의 개그씬 대부분이 나 웃긴다! 하는 노림수가 뻔하게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내내 장이수가 차창 밖에서 무섭게 쳐다보는 장면에서만 웃었습니다.
그렇다면 범죄물로서 극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느냐? 하면 역시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김무열이 연기한 과묵한 빌런은 나름대로 절제된 매력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써먹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너무 프로페셔널하고 칼같은 인물이고, 이 사람이 죽이고 다닌건 대부분이 동질의 흉악범들이라 마석도가 응징할 때의 통쾌함이 제대로 살지 않는게 치명적이죠.
또 여러 진영의 악당들이 피 튀기며 싸우고 이합집산하는 내용으로 중반을 채우는 것은 1편부터 이어져 온 시리즈 전통의 레퍼토리인데, 이번처럼 긴장감 없고 맥 빠지게 한쪽이 당하고 넘어가버린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이동휘가 연기한 IT천재 캐릭터의 부실함을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다분히 튀는 캐릭터고 분량도 꽤 많은데도 기능적으로 쓰이고 버려졌습니다.
한편 영화의 최대 장점은 역시 액션입니다. 빌런이 매력있고 없고를 떠나서 영화의 액션이 아주 잘 뽑혔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촬영 좋았고, 편집도 속도감 넘치게 잘 됐고, 마동석과 김무열을 비롯한 배우들도 아주 잘 소화해줬습니다. 참고로 이 감독이 <황야>에서도 액션은 잘 뽑았죠.
단순히 분량만 봐도 가장 많았고 질적으로도 시리즈 중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 비행기 안에서 벌이는 액션 씬은 시리즈 전통의 최후 결투 중에 가장 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퀀스 내의 완급 조절도 좋았고, 이전까지 마석도의 싸움에선 보지 못했던, 흐름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 같은 위급한 긴장감도 잠깐 동안 느껴졌죠. 그야말로 액션 장인이 공들인 티가 나는 장면들입니다.
문제는 그냥 영화 편집을 액션 편집만큼 잘해내질 못했다는 거예요. 이 영화의 편집 퀄리티는 정말 나쁩니다. 보다가 뭔가 흐름이 뚝뚝 끊긴다는 느낌을 받은 분들이 꽤 있을텐데, 딱히 특별한 장면이 아닌데도 컷을 너무 자주 자르고 컷 사이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이런 장면이 한둘이 아니에요. 편집 퀄리티만 놓고 보면 최근 몇년간 규모있게 개봉한 상업영화들 중 바닥을 다툴 것 같습니다.
영화에 같은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 좀 있는데, 이게 편집이 매끄러우면 명장면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영화처럼 하면 그냥 중구난방이고 몰입도는 박살나는 거죠.
제가 보기에 이번 4편은 액션만큼은 시리즈 중 최고로 꼽을만 하지만, 액션을 제외한 나머지 만듦새가 시리즈 중에 좀 확연히 떨어집니다. 먹던거 또 먹어서 질리는 느낌도 솔직히 없진 않은데 그 이전에 찌개의 맛이 달라진 게 문제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