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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하나의 핏줄로 이어진 것이니,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가족을 원해서 선택한 사람은 없다. 나도 내 아버지를 고르지 않았고, 아버지도 나 같은 아들을 고르지 않았다. 인간은 저마다의 우주에 산다. 가족은 서로의 접점이 그다지 없는 우주끼리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엮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계급, 가족, 고향이 전부 무너지고 다시 재건되는 일을 겪은 한국은,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자신의 가족을 대물림하려는 것에 더욱 집착한다. 가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기성세대가 손을 물려주려는 집착에서도 알 수 있다.

 

영화 <장손>은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가족, 혹은 바로 내 가족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야기다. 빨갱이를 혐오하는 할아버지, 대학 때 데모하다 다치고 내려와서 가업을 잇는 아버지, 집안 대소사나 결혼, 전통에는 관심 없는 아들. 그리고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키우고 돌보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고모 누나. 영화는 웃음이 터지고 때론 눈물이 서리는 가부장제의 적나라한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가족 간의 애증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명절이나 제사만 되면 모여 싸우고 돈 문제로 날이 서는 한국 가정의 모습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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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아직 논에 벼가 익기 전, 이들은 제사를 준비한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며 손녀는 등한시하고 손자만 챙기는 할머니의 모습, 여성들이 음식 할 때 방에 박혀 화투나 치고 있는 모습은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원래 옛날부터 제사는 밤 12시에 지냈으나, 9시로 당기는 것을 할아버지에게 제안한다. 할아버지는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고 다니는, 전통을 고수하는 고집 센 사람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니들 마음대로 해라'라며 제사 시간을 앞당긴다. 할아버지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신다. 그리고 저녁에 마을을 돌아보는데, 마을 사람들은 다들 제사를 일찍 지내고 있다. 그러면서 '요새는 다들 제사를 일찍 지내네'라고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장손인 손자를 끔찍하게도 아끼지만, 손자는 그것에 오히려 부담을 느끼며 가족과 전통을 멀리하려 한다. 대학을 다녔지만 결국 두부공장을 이어하며 술만 마시면 깽판을 치는 아버지도 싫다. 서로 간에 말할 수 없는 깊은 골이 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얼굴이라도 잠깐 보고 안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전공한 손자의 카메라로 가족사진을 찍는다.

 

제사 때 겨우겨우 모인 이 가족은 언제 만날 지 기약도 없이 다시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이 아웅다웅하는 가족이 영원할 것처럼, 산의 푸르름이 영원할 것처럼.

 

 


[이하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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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과 들녘이 아름답게 물드는 가을, 그러니까 불과 제사를 지내고 두 달 남짓 뒤다. 손자는 장례식장으로 들어선다. 손자는 바로 전에 찍은 가족사진에서 할머니만 확대해서 영정사진으로 만들어 왔다. 돌아가신 것은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더욱 기력이 쇠약해진 할아버지. 그리고 돈과 관련된 가족 간의 더욱 심한 갈등. 할머니가 누나에게 물려준 집안 음식들의 레시피. 가부장제에서 가족의 중심은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집안의 중심은 여자였던 것은 아닐까. 

 

나의 아버지도 집안의 장자이기 때문에 제사나 명절이면 가족들이 전부 우리 집에 모였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아버지와 친척들의 모습은 영화 <장손>의 그것과 빼다 박은 듯 닮았다. 우리 가족도 결국 친척들끼리 재산 분배 문제로 재판까지 하고 갈라서고, 마지막까지 같이 했던 고모할아버지께서 개신교로 개종하시면서 제사와 차례는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나마 명절에 잠깐이나마 모이는 것이 가족의 일이었는데, 그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깨졌다. 아버지가 가족의 중심이 아니라, 할머니가 가족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특히 장례식장의 모습은 내가 본 할머니의 장례식과 너무도 흡사해서 눈물이 스쳐 지나갔다. 

 

<장손>에서 고모와 아버지의 갈등은 너무나 뿌리 깊다. 그 갈등의 뿌리는 그들의 부모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만들어냈지만, 그들은 전통을 모두 물려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갈등을 겨우 억지로 붙여놨을 뿐이었다. 고모의 삶도 서글프지만, 장자였던 아버지의 삶도 나름 아프고 서글프다. 누구 하나 거기에 섣부르게 위로의 말을 할 수 없다. 아버지의 학비를 위해 일만 해야 했던 고모. 아버지를 대신해 장손의 졸업식에 갔던 고모부의 사고. 그리고 평생 모은 돈을 할머니에게 맡겼지만 사라져 버린 고모의 돈. 그러니 할머니의 죽음 이후 가족들이 해체되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중 이상한 일이 있다. 할머니를 묻으려고 할 때 할아버지의 부모님 자리를 이장하려고 파는데, 묘가 관도 없이 비어있다.

 

나무들은 죽은 나뭇잎을 떨궈내며 자신을 지킨다. 아름다워 보이는 산의 알록달록함은, 화려하게 불타 부서지는 죽음의 색이다. 가족의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에 한없는 아름다움이 서린 풍경이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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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어느덧 겨울, 할아버지는 치매가 심해져 혼자서 집을 나와 돌아다니는 일이 잦다. 손자는 그런 할아버지를 잠시 돌보고 있다. 고모의 돈은 여전히 찾지 못한 채, 가족의 갈등은 심해진다. 이때, 손자는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다 가족의 비밀을 듣게 된다.

 

가족 묘 앞에서 할아버지는 갑자기 일본말로 중얼거린다. 혼자 살아남았다고. 그리고 손자와 같이 잘 때, 자신이 어릴 적 부모가 죽었을 때의 이야기를 한다. 공산당이나 민주주의가 뭔지 글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잡아다가 골짜기에서 다 죽였다고. 중학생이었던 자신은 겨우 도망쳐 나와 숨어있었고 그래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에 영남에서는 빨갱이로 몰린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골로 간다'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때로, 가창골에서만 8천 명이 골짜기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 대구뿐 아니라 대전, 부산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구는 이승만을 싫어했고, 4.19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러나 그 이후 박정희는 공산주의를 더욱 혐오했고, 학살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했다. 학살의 유족들은 말도 하지 못한 채, 빨갱이를 혐오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서야 보도연맹 학살과 관련된 여러 증언이나 배상 판결 등이 나오고 있다. 할아버지 부모의 무덤에 관조차 없던 것은 그래서다.

 

보통 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명절 당일 오전에 지낸다. 밤 12시에 지내는 것은 망자를 기리는 제사다. 그런데 이 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살아남은 중학생이었던 할아버지가 집안의 전통이나 족보, 친척들에 대해 뭘 얼마나 알겠는가. 거기에 더해 할아버지는 고모와 할머니의 돈을 모두 장손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 모아두고 있었다. 대물림에 대한 집착은 어쩌면 부서져버린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삶의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가부장제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을 여자에게 요구하고, 남자에게 지킬 것을 강요하며, 번듯한 집안의 번듯한 가족으로 보이게 애쓴 할아버지에게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학살에서 살아남은 할아버지는 '내가 다 손을 써놨다'라고 한다. 이 비밀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가 중얼거린 말을 들은 손자만이 알고 있다. 이것이 다일까? 이 가족의 비밀과 아픔은. 

 

할아버지는 장손에게 물려줄 것은 물려주고,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이 안고 간다. 많은 비밀을 간직한 채, 치매에 걸린 것인지 아닌 것인지 이젠 사람들이 찾지도 못할 산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말하게 된 비밀과 말하지 않은 비밀들은 영영 묻혀버린다. 

 

내리는 눈은 그렇게 검은 땅을 하얗게 덮어버린다. 가족의 아픔과 죄를 감춰버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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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 성진은 극중 배우로 나오는데,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나오다 최근 영화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하며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성진역을 맡은 배우 강승호가 최근 찍은 영화는 넷플릭스의 <무도실무관>이다.

 

 

출처: 본인 브런치스토리

https://brunch.co.kr/@casimov/233


profile 카시모프

별들 사이를 여행하는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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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초코무스 2024.09.20 23:05
    저도 보는내내 조부와 조모 생각이 계속나고 특히 장례식 장면부터 마음이 무거워지더라고요. 스토리 흐름이 계절의 흐름과 닿아있다는 의식을 하고 본것이 아닌데 무코님 글을 보니 계절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개봉주에 못봐서 영화를 늦게 봤는데 많은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 @초코무스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카시모프 2024.09.21 19:34
    댓글을 이제 봤네요;
    장례식 장면.. 여러모로 너무 리얼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다른 것도 그냥 가족 영화라기엔 많은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영화의 완성도도 훌륭한... 이런 영화가 많이 걸려야할텐데 말이죠 ㅠ
    잘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 profile
    Nashira 2024.09.21 13:36
    봄도 있습니다~ 조카 늘~봄이요. ㅎㅎㅎㅎ
    전 양가가 조부때 개신교/천주교로 개종하는 바람에 제사를 구경도 못해봐서 전통문화 체험 느낌으로 관람했어요.
    저흰 딸을 엄청 귀하게 여기는 아들은 남아도는? 집안인데도 명절날만큼은 분위기가 옛스럽게 바뀌더군요.
    (막둥이 아들인 즤 아빠가 영화속 고모이자 외가의 데릴사위 역할을 수행하고, 장손은 또 엄청 챙겨서 큰아빠와 큰사촌은 사고날까봐 같은 차량 절대 안탄다는...)
    와글와글 큰집에 모이는 성묘/명절 분위기가 많은게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또 달라서 추억돋으며 상념에 빠져드는 영화였네요.
  • @Nashira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카시모프 2024.09.21 15:02
    저는 아버지가 딱 경북지역 사람이라.. 완전 분위기가 비슷했어요 ㅎㅎ 추억이 새록새록.. 전통과 한국 시골의 모습을 여러 방식으로 너무 멋지게 재현한데다, 그 이면에 감춰진 아픔을 잘 보여줘서 너무 좋은 영화였습니다.
    늘봄이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네요 ㅎㅎ 노리고 이름지은거 같아요 ㅎㅎ
  • 알폰소쿠아론 2024.09.22 22:48
    어제 봤는데 리뷰를 이제 봤네요.
    영화 볼때 동네가 같은 날에 제사 지내는 줄은 캐치를 못했는데, 나중에 다시 보게 되면 확인해봐야겠어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알폰소쿠아론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카시모프 2024.09.23 16:52
    사진 찍고 집으로 다같이 돌아가는 길이었을거예요 아마. 저녁에 동네가 보이는.. 집집마다 제삿상 놓고 제사지내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profile
    감튀중독 2024.09.23 00:24
    어릴적 생각이 많이 났어요. 요즘에도 이정도의 집안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글 잘 읽었습니다.
  • @감튀중독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카시모프 2024.09.23 16:53
    저도 어릴적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제사 지내는 분들 많을지 문득 말씀들어보니 궁금해지네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deonggeureoni 2024.09.25 15:01
    리뷰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재밌게 읽었어요!
  • @deonggeureoni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카시모프 2024.09.25 17:00
    감사합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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