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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첫 주에 BFI(영국 영화 협회)에서 런던에서 1주일 동안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프리뷰 상영을 해주고 있어 마지막 날에 가서 감상했습니다.

 

영제목은 Evil Does Not Exist인데, 영화가 시작할 때 영어 제목이 한글 어순처럼 Evil(악은) - Exist(존재) - Does(하지) - Not(않는다) 순으로 차례대로 나오며 Not에 방점을 찍고 완성되는 모습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습니다.

 

 

IMG_7572.jpeg.jpg

 

 

일단 드니 빌뇌브는 명함도 못꺼낼 정도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화의 절반이 자연의 시간의 흐름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긴 듯 정말 호흡이 느린 영화였는데 (2시간이 채 안되는 러닝타임이지만 2시간이 약간 넘는 영화를 본 기분이었습니다), 시퀀스가 길긴 하지만 관객들이 그 지극히 평범하고 긴 장면들을 다 쭉 지켜보게 만들더군요.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의미가 없는 장면은 또 없고요. 그런 차원에서 해외 리뷰 중에 "숨이 막힐것 같다"라고 표현한게 한편으로는 이해가 좀 되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니 왜 중요한 시퀀스들을 그렇게 길게 보여주는게 중요했는지 좀 더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트하우스 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았으나 근 몇 년간 본 영화 중에 이 정도로 관객에게 큰 충격을 남기며 끝내버리는 영화가 있었나 싶네요. 머리에 마구 떠오르는 질문들에 대한 제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영화가 끝나고 제목을 보며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작품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호흡이 다소 길고 관객을 거대한 블랙홀에 빠뜨리지만, 그 내용은 또 흥미롭고 짜임이 영리하며 은근히 유머스럽고 배우들 연기도 좋아서 오히려 이 작품이 영화의 본연에 충실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류스케 감독의 작품을 본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었고 포스터의 여자 아이가 느낌이 있어서 본건데, 영화 한 편으로도 이 감독이 천재임을 인정하게 되네요.

 

 

IMG_7571.jpeg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이번 영화가 마치 맨 처음 영화를 찍은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색다른 시도였고, 결말에 대해선 자신도 여러가지 답을 들고 있지만 관객들이 다양한 놀라운 해석을 하길 바라며, "영화의 결말에 대해 관객이 망설이길 바란다. 그런 망설임이 바로 시네마이기 때문이다"라는 좋은 말도 하셨더군요. 이번달 말에 한국에 개봉하면 무코 게시판에 올라올 후기와 해석들이 매우 기대되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눈덮인 일본 시골 숲의 풍경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절절하게 아름다우면서도 불협화음이 살짝 섞인 이시바시 에이코의 OST가 매우 좋았고, 원래 직업은 감독이지만 이번작의 주연을 연기한 오미카 히토시가 이 영화에 부여하는 현실적인 무게감도 정말 훌륭하고, 그리고 주인공의 딸 하나를 연기한 아역 배우 니시카와 료의 청아한 얼굴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IMG_7573.png.jpg

 

 

사족으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에 제가 극장에 가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일본 영화는 몇 년 전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였는데, 두 일본 영화를 보고 나서 공통적으로 든 생각은 "왜 한국에는 이런 장르나 주제의 영화가 없지?"였습니다. 물론 한국과 일본 영화가 각자의 특징이 있고 각자 잘하는게 있지만, 우리나라도 스펙트럼이 좀 더 넓었으면 하는 생각도 가끔 드네요.

 

 

 

평점 : 4/5


profile joon3523

https://blog.naver.com/moviein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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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시집희EYEMAX 2024.03.08 08:20
    필관하게 부르는 글이네요.
    너무 기대됩니다. ◡̈
  • 알폰소쿠아론 2024.03.08 08:31
    그렇게 느리다니 각오를 좀 해야겠군요.
    그런데 '너췌장~' 같은 경우 제겐 썩 특출나거나 독창적이지 않은 범작으로 다가왔는데, 어떤 점에서 넓은 스펙트럼의 예시로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알폰소쿠아론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joon3523 2024.03.08 09:22
    그러고 보니 췌장은 벌써 7년 전에 본 영화네요. 그때는 흔한 로맨스물과는 좀 결이 다른 남녀의 우정에 관한 작품이라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생각을 한 기억이 여태 남아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지적하신대로 본문에서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을 논하는데 제가 그걸 끌고 온 건 객관적으로 부적절했다고 생각되네요. 저부터 스펙트럼을 늘려야 하는 ㅎㅎ
  • profile
    장하오 2024.03.08 08:49
    정말 다른 지점에 있는 두 작품을 언급하셨네요. 너췌장, 악존않ㅋㅋㅋㅋ 너췌장 류는 일본에서 매년 쏟아지는 하이틴멜로 중 하나입니다.
  • @장하오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joon3523 2024.03.08 09:22
    그러게요. 저도 일본 하이틴멜로를 여러 개 보긴 했는데 너췌장이 개인적으로 좋게 기억에 남아있다고 감히 악존않과 붙여버리는 엉뚱한 짓을 했네요 ㅋㅋ
  • profile
    totoro 2024.03.08 08:55
    정말 숨막히는 영화였죠.
    첨부터 끝까지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영화 끝나면서 숨이 탁 터지며 물음표 백만개로 바로 또 생각하게 만드는..😅
  • @totoro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joon3523 2024.03.08 09:28

    영국인 관객들 중에 나이든 분들도 많으셨는데 다들 초집중하는 극장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근데 제 옆자리에 외국인은 처음에는 자기가 예상한 게 아니었다는 듯이 몸을 베베 꼬더군요 ㅋㅋ 결국엔 그분도 점점 재미있어하면서 빠져드시더군요

  • profile
    조부투파키 2024.03.08 15:41
    '드라이브 마이 카' 보면서 호흡이 길다 느껴졌는데
    아마 이 작품은 그 이상이 될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드네요. 기대됩니다.
  • @조부투파키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joon3523 2024.03.08 18:48

    정보를 조금 찾아보니 호흡이 긴 것은 악존않과 드마카가 큰 차이는 없을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악존않의 경우 자연이 주제와 관련해 중요한 소재이고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을 길게 잡는다는 면에서 호흡에 대한 느낌이 사뭇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마카의 장면들을 여러 개 보니 악존않에서도 차 운전 씬이 꽤 나온다는 점 등등 드마카와 비슷한 면들이 꽤 많이 보이네요. 정리하면 만일 악존않이 전작 이상의 작품이라고 느끼게 될 경우, 긴 호흡 외에도 약간 다른 측면에서도 그런 면이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profile
    프로포스터 2024.03.09 10:08
    드라이브 마이카 가 워낙 제 스타일이었어서 이번에 또 어떤 섬세하고도 숨막히게 제시할건지 정말 궁금하게 만드네여
  • @프로포스터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joon3523 2024.03.09 11:56
    그러셨다면 이번 작품은 꽤 친근하면서도 또 색다르고 야심도 있는 영화로 보이지 않을까 짐작되네요. 말씀하신 두 가지 - 단순함 속의 섬세함, 그리고 주제를 숨막히게 제시하는 것이 둘 다 있었습니다
  • 업다운 2024.03.11 11:16
    나이가 들어가니, 정확히는 영화를 많이 보다 보니
    호흡이 느린 영화에 적응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정확히는 주제나 소재가 저에게 와닿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드라이브마이카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신작 기대합니다.
  • @업다운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joon3523 2024.03.11 19:47
    약간의 스포를 덧붙이면 초반에 긴 테이크로 가만히 또는 찬찬히 찍은 각각의 장면들을 보여준뒤, 서사가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중반부터 흐름을 타기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터는 호흡이 느리다는 느낌이 잘 들지는 않더군요. 류스케 감독이 부산에 와서 한 인터뷰를 찾아보니 초반에 긴 장면들이 관객들이 거기에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던데, 개인적으로도 처음 삽십분 또는 한 시간 쯤 지나가면 익숙해졌던 것 같습니다. 극장에서 볼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러닝타임도 길지는 않네요.

    그리고 이번 영화는 단지 인간 내면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 좀 확장이 되고, 그리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영화의 제목이자 거대 담론(이것을 본문에서 블랙홀이라고 표현했습니다)을 관객에게 딱 던지는 한 방이 있어서 완전히 마음에 드는 영화는 아닐지라도 그 주제가 전작보다는 좀 더 와닿으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 profile
    만세 2024.03.26 12:42
    후기 감사합니다. 이번주에 보러 가는데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서 뭔가 기묘하고 흥미가 생기네요.
  • @만세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joon3523 2024.03.26 23:02
    1/3 정도는 자연을 명상하는 기분이고 인물들 간 갈등구조도 예고편으로 짐작이 가능할 정도로 단순한 편인데, 감독이 쓰는 충격 요법이 임팩트가 있고 (시네21 평론가들도 도끼질, 벼락이란 표현을 썼죠) 그걸 보면서 영화가 관객을 이렇게 미궁에 빠뜨리는 맛도 있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ㅎㅎ 좋은 관람 되시길 바랍니다
  • @joon3523님에게 보내는 답글
    profile
    만세 2024.03.26 23:20
    뭔가 자연을 명상하다가(?) 졸까 걱정이네요ㅎㅎ 최대한 멀쩡할때 가겠습니다ㅋㅋㅋ조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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